[소준섭의 중국 경제인열전] ‘만력신정(萬曆新政)’의 개혁가, 장거정(張居正)

입력 2020-02-19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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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왕조 명나라는 그의 개혁이 있어 그나마 수명이 연장되었다

흔히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 그만큼 개혁은 어렵다. 장구한 중국의 역사를 살펴봐도 성공적인 개혁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명나라의 명신 장거정(張居正·1525-1582)이 주도했던 ‘신정(新政)’의 개혁은 상앙과 진시황 및 수당 시대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영향력이 가장 크고 가장 성공을 거둔 개혁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실 장거정의 개혁 정책에 힘입어 명나라 왕조는 그 명맥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무능했던 명나라

조선 왕조가 명나라를 하늘같이 떠받들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숭명(崇明) 사상은 지금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아직 명나라 마지막 황제의 연호를 사용하는 우리나라 유교 서원도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사실 중국 역대 왕조에서 명나라는 대표적으로 무능했던 왕조였다. 만력제(萬曆帝)는 그가 황제의 자리에 있던 48년 집권 기간 중 후반기 30여 년간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며 틀어박혀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신하들과 만나 국사를 논하지도 않았다. 정사 처리는 주로 유지(諭旨)라는 형식으로 전달되었고, 그것조차도 황제는 거의 결정하지 않았다.

만력제가 죽은 후, 우여곡절 끝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 천계제(天啓帝)는 아예 글도 모르는 일자무식이었다. 그는 애초부터 정사를 처리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 재위 기간 내내 오직 대패와 톱 그리고 끌을 품에 지니고서 언제나 목공(木工)과 칠(漆) 작업에만 열중하여 침대를 만들고 궁궐을 보수했던 ‘목수 황제’였을 뿐이었다. 어리석었던 천계제가 죽고 나서 10년이 조금 넘어 명나라는 끝내 멸망하고 말았다.

장거정이 있어 나라가 안정되었다

장거정은 만력제 신종(神宗) 때 사람이었다. 그는 내각 수보(首輔:내각 수석학사)로 있으면서 ‘만력신정(萬曆新政)’ 혹은 ‘장거정의 개혁’이라 칭해지는 개혁을 이끌었다.

장거정은 다섯 살에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았고, 일곱 살에는 6경을 깨우쳤다. 어린 나이에 즉위한 만력제 때 수보의 직책을 맡아 일체의 군정(軍政) 대사를 모두 처리하였다.

이 무렵 남부 해안 지역의 왜구는 이미 소탕되었으나 북방 몽골족의 일파인 타타르족이 변경을 자주 침범하여 여전히 명나라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었다. 장거정은 왜구를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던 명장 척계광(戚繼光)을 북방으로 불러 계주(薊州)를 지키게 했으며, 요동 지역은 이성량(李成梁)으로 하여금 방비하도록 하였다(이성량은 척계광과 함께 북방 몽골족과 남방 왜구를 진압한 명장으로서 본래 조선 출신이었다. 80세에 이르기까지 요동지역을 관리한 장군이었으며, 임진왜란 때 조선에 온 명나라 대장 이여송(李如松)의 아버지이다. 그는 청나라 건국의 토대를 쌓은 누르하치와 미묘한 관계에 있었고, 누르하치는 이 관계를 이용하여 힘을 강화시킬 수 있었다).

이들은 타타르족의 진격을 막기 위하여 산해관(山海關)에서 거용관(居庸關)에 이르는 장성 위에 3000여 개의 보루를 쌓았다. 군율이 엄하고 무기가 우수했던 척계광 군대는 타타르족을 여러 차례에 걸쳐 격퇴시켰으며, 타타르족의 수령 알단 칸은 화의와 통상을 청했다. 장거정은 조정에 주청하여 알단 칸을 순의왕(順義王)으로 봉했다.

그후 20~30년 동안 명나라와 타타르족 간에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북방 백성들은 오랜만에 안정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또한 능운익(凌云翼)과 은정무(殷正茂) 두 장수로 하여금 서남 지역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였다.

▲16세기 중반 명나라의 정치 부패와 사회 혼란을 바로잡아 부국강병과 민생 안정을 꾀한 정치가 장거정.

일조편법(一條鞭法) 세수제도 개혁으로 부정부패 억제

장거정의 개혁이 시행될 무렵, 명나라 조정은 이미 부패가 너무 만연해 있었다. 대지주들은 백성들의 토지를 마음대로 겸병하고 수탈하였다. 그리하여 지주 호족들은 갈수록 부유해졌지만, 반대로 국고는 날이 갈수록 텅텅 비어갔다.

장거정은 토지를 철저하게 재조사하여 황실의 친인척이나 대지주들이 숨겨놓은 토지를 밝혀냈으며, 지주들의 토지 겸병을 억제하고 나라의 재정 수입을 늘렸다. 그런 뒤에 그는 잡다한 부세와 노역을 하나로 합쳐 세금을 은으로 납부하도록 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이 법은 ‘일조편법(一條鞭法)’이라 칭해졌는데, 이러한 일련의 세수(稅收) 제도 개혁에 의하여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크게 억제되었다.

만 리 밖에서도 아침에 내린 명(命)이 저녁에 시행되다

한편 관리들에 대한 개혁 조치는 ‘고성법(考成法)’이라 칭해졌다. 장거정은 이 고성법에 의거하여 위로는 내각부터 맨 아래의 아전에 이르기까지 반드시 업무 평가를 받도록 하였다. 또 당시 나라가 어지러운 틈을 타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나 백성들을 괴롭히고 관청까지 습격해 양식과 무기를 탈취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였다. 하지만 지방 관리들은 그 사실을 은폐한 채 중앙 정부에 아예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장거정은 보고하지 않은 관리는 고하를 막론하고 무조건 엄벌에 처했다. 그러자 정부 모든 부처에서 업무 효율은 크게 높아졌고 책임이 명확해졌으며, 신상필벌(信賞必罰)로 상과 벌은 추상같이 분명해졌다.

이로 인하여 조정에서 어떤 명령이 아침에 내려지면 비록 만 리 떨어진 먼 곳이라도 저녁에 시행될 정도가 되었다. 이 관료 개혁의 목표는 바로 부국강병이었다.

이렇게 10년 동안 개혁이 진행되자 그 효과는 뚜렷하게 나타났다. 부패하기 짝이 없었던 명나라 정치도 크게 개선되었고, 만성적으로 적자 상태였던 재정은 흑자 400만 냥으로 돌아섰다. 국고에는 10년을 먹고도 남을 양식이 비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조치로 인하여 크게 손해를 입게 된 귀족들은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했지만 내심으로는 장거정을 극도로 미워하였다.

그가 세상을 뜨니 나라도 쇠락하다

1582년, 장거정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장거정이 죽자 만력제는 자신이 직접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자 그동안 장거정에게 불만을 품고 있었던 대신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이들은 장거정이 개혁을 한다며 독단적으로 정사를 전횡했고 이러저러한 일들을 모조리 잘못했다며 맹렬히 비난하면서 그에게 엄중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침내 이듬해에 황제는 장거정의 모든 직위를 삭탈하고 가산도 모조리 몰수하였다. 장거정이 시행했던 개혁 조치 역시 모두 철폐되었다. 이렇게 하여 개선되고 있던 명나라의 정치는 다시 급속하게 쇠락해 갔다. 장거정이 세상을 뜬 뒤 곧바로 명나라가 멸망하지 않고 그나마 60여 년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순전히 장거정의 개혁 덕분이었다. 근대 중국의 저명한 학자인 양계초(梁啓超)는 장거정을 “명대(明代)에서 유일한 대정치가였다”라며 그 업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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