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발언대] '여성 제로 이사회' 이제 그만

입력 2020-02-0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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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

▲구미영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여성 임원이 1명 이상 포함되도록 규정하는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2020년 1월 9일 국회 본회의에서 의결된 것은 새해를 맞이해 들은 가장 놀랍고 기쁜 소식이었다. 이 개정안이 2018년 10월 발의될 때만 해도 이렇게 빠르게 통과되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남성으로만 구성된 이사회는 다양한 관점에서의 혁신적인 논의와 의사결정에 장애물이기 때문에 하나의 경영 리스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전세계적으로 공유되는 인식이다. 여성가족부가 성별균형 포용성장 파트너십 자율협약 체결 사업을 시작한 것도 이러한 국제적인 흐름을 따라가려는 노력이다. 롯데그룹, 풀무원, SC제일은행 등의 기업은 자발적으로 여성 임원의 비율 목표를 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 여성 관리자 교육ㆍ훈련 등의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발적인 노력은 소수의 기업에서만 나타난다는 것이 현실이다.

여가부가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매출액 상위 500대 기업에서 여성 임원의 비율은 3.6%에 불과했고, 2019년 1분기 주권상장법인 2072개 기업 중 여성 임원이 전무한 기업이 67.9%에 달했다. 이사회 구성에서의 성별 편향은 더 이상 기업의 자발적인 노력에만 맡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이다. 이러한 점에서 '여성 제로' 이사회는 없어야 한다는 개정 자본시장법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입법적 대응이다.

해외의 사례를 보더라도 어떠한 방식과 수준으로든 입법적, 정책적 개입이 필요함이 분명하다. 프랑스는 여성 임원의 목표 비율을 법률로 정하고 위반 시 제재 조항까지 두었다. 상장기업과 공공기관, 500인 이상 고용하는 일정 규모 이상의 비상장기업은 2017년까지 40%, 250~500인 이상 고용하는 비상장기업은 2020년까지 40%의 여성 임원 비율을 달성해야 한다. 입법적 노력의 결과 2008년 상장기업 임원 중 여성의 비율이 8.8%에서 2019년 42%로 급상승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밖에도 이사회 내 성별 다양성을 촉진하기 위한 입법적, 정책적 수단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모든 국가가 프랑스처럼 처벌 조항까지 포함한 입법을 하는 것이 능사는 아니기 때문이다.

호주는 2010년부터 여성 임원 현황과 향후 달성목표 및 실적을 연차보고서에서 공개하도록 의무화했고, 여성임원 비율이 8.6%에서 27.4%로 증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고 한다.

영국은 기업 경영에 정부가 개입하는 것에 대단히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국가임에도 2016년에는 재무부가 금융기업을 대상으로 ‘여성과 금융 선언’ (Women in Finance) 사업을 시작해 2018년에는 330여개의 기업이 선언에 참여하고 있다. 선언에 참여한 금융기업은 여성 임원의 현황과 향후 목표를 설정하고 매년 진행 경과를 공개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2010년 12.5%였던 100대 상장기업의 여성 임원 비율은 2019년 30%를 넘어서게 됐다.

혹자는 한국도 법률로 의무화하기 전에 자발적인 공개와 목표 설정을 우선 시행할 수 있느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기업의 자발적인 변화 동력에만 의지하기에는 이사회 구성의 편향성이 국내외적으로 문제가 될 정도로 낮은 수준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번 개정법은 위반한 기업에 대한 벌칙이나 행정벌 규정은 두지 않고 있다. 여성 제로 이사회를 줄여야 한다는 정책적 방향을 명확히 선언하되, 사실상 기업의 자발적인 변화를 유도하는 입법인 것이다.

이번 자본시장법 개정은 여성이 전무한 이사회의 비율을 낮춰야 한다는 국내외의 요구와 흐름을 따른 거대한 첫 걸음이자 선언이다. 입법적, 정책적 개입이 필요한가라는 논쟁은 과거에 두고 이제는 어떤 방식으로 개정법의 취지를 실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인가에 사회적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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