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택 연구 32년차 배테랑
“너무 힘들 땐 멀리 보지 말고 한 걸음만 내딛는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견디기 쉽다.”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개포동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에서 만난 천현숙 SH도시연구원장은 가정과 일,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주택분야 연구에서 30여 년의 긴 호흡을 이어올 수 있었던 깨달음을 이같이 전했다.
국토연구원 선임연구위원과 주택토지연구본부 본부장, 도시재생특별위원회 민간위원, 한국주택학회 회장 등 주택 연구에서 활발한 궤적을 남겼던 그는 지난해부터 SH도시연구원에 몸담았다. 그야말로 주택분야 연구와 분석에 빠삭한 베테랑인 셈이다. 연구원 설립 27년 역사에서 두 번째 외부 영입 인사이자 2호 여성 원장이 된 이유다.
그는 SH공사와 한몸이나 다름없는 연구원의 향후 방향과 책임, 그리고 여성 관리자로서의 각오와 조언을 빈틈없고 다분진 말투로 이어갔다.
◇올해 노후 대단지 복합화사업 연구 중점… “임대주택 양ㆍ질 모두 잡아야 할 때” = 천 원장은 올해 연구원이 서울의 노후 임대단지 복합화사업 모델을 가장 중점적으로 연구할 것이라고 전했다. 준공 30년이 다 된 노후 임대아파트를 정비해 공급량을 늘리고 동시에 커뮤니티 등 편의시설도 함께 건립해 지역주민이 모두 이용할 수 있는 시설로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안이다.
그는 “주거복지 서비스 개선, 공공주택 패널 데이터를 활용한 공공임대 입주자 특성분석, 콤팩트시티 개발, 쪽방촌 개발 등 다영한 연구를 하고 있지만 올해 서울 28만 가구의 임대주택 중 재정비 시점에 도달한 노후 단지들을 관리해야 하는 시점이 된 만큼 지역사회가 필요로 하는 편의시설을 함께 짓도록 해 임대주택이 기피시설 아닌 선호시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SH공사가 공공임대주택 확대라는 양적 발전을 해오면서 놓쳤던 사회간접자본(SOC)시설 확충 역시 올해 연구원이 발전시켜야 하는 과제 중 하나다. 주민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하는 맞춤형 편의시설을 제공하는 ‘공간복지’다. 김세용 SH공사 사장이 핵심 비전으로 내세운 공간복지를 진화시킬 시설의 종류와 구현 방법을 더 다양하게 연구하는 막중한 책임을 안고 있다.
그는 “매입 임대주택의 경우 일정 규모 이상의 단지로 공급되지 않아 편의시설 부족이 주거 만족도를 크게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지역별 혹은 임대주택 규모별로 필요로 하는 편의시설 성격을 파악하고 적합한 모델을 만드는 게 우리가 할 일”이라고 말했다.
SH공사는 1989년 창립 이래 20만 가구에 가까운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해 왔지만 물량 확대에 치중한 탓에 품질은 놓치다 보니 ‘임대주택=저소득층 거주지’라는 인식이 오랜 시간 확산해 왔다. 한정된 자원 안에서 사회적 합의가 그 수준에 머물렀던 탓이지만 이 같은 인식은 결국 임대주택을 보이지 않는 계급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사회 문제를 야기했다.
천 원장은 “이제 면적, 구조, 커뮤니티 등 질적 개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수요자 맞춤형 임대주택이 중요한 흐름이 됐다. 양과 질을 같이 다뤄야 하는 더 어려운 시기가 온 것”이라면서도 “저성장 국면에서 임대주택을 확보해야 하는 부담이 커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전셋값이 급등하는 등 주택시장이 급변하는 시기엔 임대주택이 많을수록 저소득층이 받는 충격을 덜어주는 안전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공급 역시 놓쳐선 안되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출산ㆍ주거 덫에 걸린 청년들 위해 더 연구해야 = 3포세대, N포세대로 대표되는 청년들의 주거 문제에 대한 천 원장의 시선은 묵직하다. 앞서 천 원장은 저출산고령사회정책운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해 왔다. ‘출산’과 ‘주거’라는 청년들의 현실 문제이자 대한민국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지표를 가장 가까이 직면하고 분석해 온 셈이다.
그는 “최근 청년들이 현실에서 느끼는 박탈감과 위기감이 상당하다. 우리 전 세대는 열심히 살면 희망이 있고 무언가 보장된다는 믿음이 있었기에 단칸방에서도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출산율이 낮다는 건 미래를 희망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의미다. 미래를 얼마나 희망적으로 보느냐에 대한 반대지표인 셈이다. 출산율의 덫에 갇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주거 문제다. 우리가 이들의 주거 문제에 집중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천 원장은 SH공사가 1~2인 가구를 주요 대상으로 만든 ‘청신호’(청년과 신혼부부만을 위한 맞춤형 공공임대주택) 브랜드를 강조했다. “서울은 전국에서 집값이 가장 비싸다. 서울의 출산율이 유독 낮은 것도 이 때문이다. 주거비 지출은 합리적인 수준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청년주택 특화 정책인 청신호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개발 가능 용지가 부족한 서울에서 역세권이나 도시정비를 통한 이 같은 주택 공급 확대는 필수적이다. 연구원은 공급 방안과 다양한 혁신사업 모델을 계속해서 연구하고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32년 차 직장인, 일ㆍ가정 양립 몸으로 부딪쳐온 일하는 엄마 = 저출산고령사회정책운영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던 천 원장은 대한민국이 출산율 덫에 갇힌 이유로 주거 문제와 함께 출산과 양육을 지원하는 시스템 미비를 꼽았다. 32년 차 주택 연구학계의 베테랑인 그는 동시에 누군가의 도움을 청하기가 어려워 남의 손을 빌려 육아를 해야 했던 그야말로 ‘여성 직장인’이었다. 자녀가 어릴 적 뇌수막염에 걸렸을 땐 아이가 입원한 3주 가까운 기간을 남편과 번갈아가며 병원에서 쪽잠을 자고 출근했다.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긴 시간 동안 피를 말리는 심리적 압박에도 천 원장은 박사과정을 마치기 위해 병실에서 수업 발표 준비를 하며 아이를 돌봤다고 한다. 그는 아이가 아픈 극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일과 가정의 양립을 지속하는 데는 어려움이 크다고 꼬집었다.
천 원장은 “우리나라는 노동의 유연성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수당이나 어린이집 확대 등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어 일하면서 자녀를 키울 수 있는 탄력적인 노동 환경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며 “양육은 가정이나 여성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이 여전히 부족하다. 정책과 제도 구현 역시 초보적인 수준이다. 많은 조직이 여성 신입사원 비율은 높은데도 여성 관리자를 키울 준비는 안 되어 있는 것 같다”고 일갈했다. 조직이 여성 관리자를 충분히 육성하면 이는 후배 여성 관리자를 다시 키워내는 선순환의 고리로 이어져 건강한 조직이 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그가 딸 아이 세대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고 싶단 생각을 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그는 제도적으로 열악한 현실 속에서 일과 가정을 모두 꾸려가야 하는 여성 후배들에게 전문가로서의 브랜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일과 가정 모두 열심히 하다 보면 누구든 지칠 때가 있다. 그럴 땐 너무 멀리 보지 말고 한 걸음만 내딛는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견디기 쉽다. 건강한 체력 관리와 함께 경험과 지혜를 빌릴 수 있는 좋은 멘토를 만들라고 말하고 싶다”며 “조직은 발전하는데 나는 소모되는 부속물처럼 느껴질 땐 지치고 힘들어진다. 조직과 구성원인 내가 같이 성장하는 게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관리자의 위치에 오른 뒤로 늘 여성 관리자로서 바람직한 리더십을 고민해 왔다고 그는 털어놨다. 지위 권력에 의한 네트워크 조성이 아닌 공정한 기회 부여와 평가를 원칙으로 삼는 게 그가 내린 결론이다.
천 원장은 “마더 테레사 수녀가 종교라는 개인적인 믿음을, 빈민들의 거리로 나가 돌봄을 실천함으로써 사회적 영향력을 갖게 만들지 않았나. 남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구성원들이 자기 안에 숨겨진 잠재력과 역량을 꺼내 성과를 내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다“고 털어놨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그는 올해부터 꼭 실천하고픈 소박한 계획 하나가 있다고 했다. “SH도시연구원에 몸담고 있는 직원 26명의 생일에는 직접 쓴 축하 카드를 선물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