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찬국의 세계경제] ‘가보지 않은 길’ 이제 그만 갈 때 됐다

입력 2020-01-1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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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충남대 무역학과 교수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현 정부를 대변하는 구호이다. 비장함이 넘치고 결의에 찬 듯하여 체 게베라 같은 혁명가나 스티브 잡스 같은 혁신 기업가를 연상시킨다. 첫 번째 개척가는 남미 정글에서 헤매다 잡혀 죽임을 당했고, 두 번째 개척가는 대성공을 거두어 짧은 기간에 전 세계적 정보 및 음악 시장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 이 두 가지 예는 가보지 않은 길을 가는 것이 쪽박, 또는 대박이라는 극단적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국가 경제의 지침으로 이 구호가 적절할까? 아니다. 잘못되면 수많은 현재 및 미래 세대 국민들이 피해를 보기 때문이다. 애플의 많은 직원들을 단기간에 백만장자로 만들어준 스티브 잡스의 경우와 유사하게 국가 경제의 큰 개선이 있을 수도 있지만, 길이 잘못되면 정글에서 벌레에 뜯기다 비명횡사하는 상황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기대 급부(pay-off)를 생각하면 ‘가보지 않은 길’은 국가 경제 운용에는 부적절한 모토이다.

깊은 산에서 산악 가이드와 객기 찬 등반객이 가보지 않은 길을 접근하는 방법은 차이가 난다. 전자는 기상 조건, 동반자들의 체력, 식량 등을 고려한다. 정말 중요한 차이점은 신중한 가이드는 그 길로 갔을 때 어떤 곳에 도착할지에 대해 신중히 고려한다는 것이다. 새 길을 가는 것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더 안전한 곳, 또는 목적지로 가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이다.

현 정부는 대대적 팡파르와 함께 소득(임금)주도 성장론(이른바 ‘소주성’)으로 2017년 영업을 개시했다. 필자가 들어보지 못했던 이론이라 관련 자료들을 찾아보면서 주장의 바탕이 되는 경제 논리나 실증적 증거가 박약해 보면서 혼자 낯이 붉어지는 경험을 했다. 경제는 노동자와 자본가의 제로섬 게임이라는 세계관을 바탕에 둔 거대담론 수준의 좌파 경제이론으로 어떤 나라에서도 시도된 적이 없었던 생경한 주장이다. 억지로 임금을 올리면 소득, 고용이 느는 선순환이 시작된다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세상의 깊은 이치를 몰라서일 수도 있기 때문에 ‘소주성’ 주장대로 하면 모두가 잘사는 세상이 만들어질까 궁금한 마음도 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2년 사이 최저임금을 30% 넘게 올렸는데 저임금 근로자들이 많은 자영업의 위축과 같은 현상적 관측에 더해 최근 연구들은 체계적 실증분석을 통해 최저임금 급상승이 전체 고용에 부정적 영향이 컸음을 확인해주고 있다.

최저임금 인상이 어려운 처지의 저임 근로자들을 위한 것이라는 상식과 달리 한국의 기형적 임금체계는 연봉 5000만 원인 근로자들도 최저임금 미달자로 만들었다. 2018년 임금 근로자 평균 연봉이 약 3600만 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뒤늦게 최저임금에 포함되는 급여 항목들에 대한 산입범위 조정을 위해 법이 개정되었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문재인 정부의 대선 후보 시절부터 간판 정책이었고 최저임금이 주요 수단이다. 사후적으로 보면 정권의 핵심 정책이 현행 임금체계하에서 시행되면 어떤 부작용을 야기할지에 대해 오리무중인 가운데 이를 밀어붙였다는 말이 된다.

집값을 잡겠다는 부동산 정책이 여러 곳의 집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았다. 투기세력은 구성원의 규모가 매우 유동적인 집단이다. 대부분 사람들이 상황에 따라 투기적 행태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마치 징벌해야 할 조폭 집단으로 설정하여 공격하는 것은 멀리 보이는 풍차가 괴물이라며 돌진한 망상에 찬 돈키호테를 연상시킨다. 이성적 판단은 실종되고 오기만 넘쳐난다.

집권 초기 정책 실험의 부작용이 가시화되며 정부의 정책에 대한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형국이다. 2018년부터 나라 밖 상황이 악화하는 가운데 정책 실험들이 진행되며 수출, 고용, 투자 등 폭넓은 경제 상황 부진으로 이어졌으나 아직도 정부는 경제 부진을 경기순환적 현상으로 보며 빠른 회복을 점치고 있다.

누울 자리를 보지 않고 강행된 정부의 정책 실험으로 경제상황은 악화일로인데 정치권에서는 경제 실정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도 참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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