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교열팀장
매듭달(한 해의 끄트머리 달을 뜻하는 순우리말)엔 구세군의 빨간 냄비와 딸랑거리는 종소리를 들으며 이웃을 돌아보는 따뜻한 마음도 필요하다. 바쁘다, 바쁘다 하다 보니 어느새 한 해의 끝자락이다. 2019년의 삼백예순 날이 다 빠져나간 달력을 보며 ‘아니 벌써’ 아쉬움이 남는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터. 차가운 바람은 야속하게도 남은 날들마저도 휙 쓸고 가려는 듯 시간을 재촉하고 있다.
“위하여 위하여/우리의 남은 인생을 위하여/들어라 잔을 들어라/위하여 위하여/목마른 세상이야/시원한 술 한잔 그립다/푸르던 오솔길 자꾸 멀어져 간다/넥타일 풀어라 친구야/앞만 보고 달렸던/숨가쁘던 발걸음도/니가 있어 이렇게, 내가 있어 이렇게/이 순간이 좋구나 친구야”(안치환의 ‘위하여’)
송년 모임이 한창이다. 직장은 물론 동창회, 향우회, 동호회 차원에서 한 해를 돌아보며 유대감을 확인하는 자리가 이어지고 있다. 여기저기서 외치는 ‘위하여’ 소리도 드높다. 시대에 따라 술자리 문화가 달라지듯 건배 구호도 세태를 반영해 변화무쌍하다. 밋밋하기 그지없지만 가장 오랫동안 끊임없이 사랑받는 건배사는 ‘위하여’가 아닐까 싶다.
술자리에서 다 함께 잔을 들어 축하하거나 건강 혹은 행운을 기원하는 건배는 전 세계 공통의 관습일 터. 우리의 ‘위하여’에 해당하는 다른 나라의 건배사를 알아두는 것도 좋겠다. 미국과 영국은 ‘치어스(Cheers)’·‘토스트(Toast)’, 프랑스는 ‘상테(Sante)’, 이탈리아는 ‘살루테(Salute)’이다.
‘30초의 미학’이라 불리는 만큼 건배사는 짧고 재치가 있어야 한다. 모임의 성격에 맞는 덕담뿐만 아니라 희망과 사회적 의미에, 재미까지 담아낸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최근 들은 것 중 무릎을 탁 치게 만든 건배사는 2020년을 겨냥한 ‘경자년’(경사로움이 자주자주 연중 내내 쭉쭉)과 ‘흥청망청’(흥해도 청춘, 망해도 청춘)이다.
송년회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한다는 송구영신에서 따온 말이다. 지나간 한 해를 반성하면서 조용하게 보내는 ‘수세(守歲)’의 개념이다. 유감스럽게도 한때 송년회 대신 ‘망년회(忘年會)’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 망년은 ‘한 해를 잊는다’는 뜻으로, 연말에 친구 혹은 친지들과 어울리며 떠들썩하게 보내는 일본의 풍습이다. 한 해를 잊는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망령, 망상, 망신 등 ‘망’으로 시작하는 말을 워낙 싫어하는 데다, 일본어 잔재인 ‘망년회’ 소릴 들으려니 화가 나고 부끄러웠다.
망년회가 사라진 요즘엔 송년회도 순우리말인 ‘설아래 모임’, ‘설밑 모임’, ‘세밑 모임’으로 하자는 소리가 들려 반갑다. 설밑, 세밑은 음력으로 한 해의 밑, 즉 한 해가 끝날 무렵인 섣달그믐날을 뜻한다. 이날은 밤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하여 ‘눈썹 세는 날’이라고도 한다. 어린 시절, 이날 동생이 꼬박꼬박 졸다가 잠이 들면 눈썹에 밀가루를 하얗게 칠하곤 다음 날 아침 골려주기도 했었다. 해가 저문다는 뜻의 ‘세모(歲暮)’ 역시 한 해가 끝나는 시기나 설을 앞둔 섣달그믐을 일컫는다. 그런데 세모는 망년과 마찬가지로 일본식 한자이므로 버려야 한다.
살면서 마음이 통하여 서로를 알아주는 벗을 만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을까. 난초처럼 향기로운 사귐인 ‘지란지교(芝蘭之交)’, 맑은 물처럼 담박한 친구인 ‘담수지교(淡水之交)’, 목숨을 나눌 만큼의 사이인 ‘문경지교(刎頸之交)’ 등 참된 우정을 뜻하는 말들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한 해의 끄트머리에 서서 지난날들을 돌아보니 참으로 귀한 인연을 여럿 만났다. 특히 인품이 훌륭하고 학문이 뛰어나며 지혜롭고 문향(文香) 가득한 분들과 우정을 나눌 수 있어 더없이 의미 있는 2019년이다. 나이와 무관한 벗인 망년지교(忘年之交), 망년지우(忘年之友)는 너무나도 고상한 우정이다. jsjy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