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부 교열팀장
‘적과 흑’의 작가 스탕달의 고향인 프랑스 동남부 그르노블도 ‘소설 자판기’로 유명한 도시다. 시청, 도서관, 공연장, 관광안내소 등 사람이 모이는 장소에는 ‘단편소설 자판기’가 놓여 있다. 독서 시간 1분, 3분, 5분 가운데 골라 읽을 수 있다. 3분짜리의 경우 폭 8㎝ 종이 길이가 60㎝, 5분이면 1m 이상 길게 나온다. 적당한 분량의 작품을 무료로 감상할 수 있어, 이곳에선 스마트폰 화면을 보는 이가 드물다.
영국에 다녀온 친구는 그곳에서 본 ‘기막힌’ 자판기 이야기를 했다. ‘결혼 자판기’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결혼식에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 있는 기기다. 웨딩드레스, 셔츠, 반지, 하객을 위한 선물, 축하 카드…. 자판기에 돈을 넣으면 기기가 작동한다. 음성 안내에 따라 결혼 서약을 하고 캡슐에 담긴 결혼반지를 꺼내 끼고, 신랑·신부 이름을 입력해 임시 결혼증명서를 발급받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딱 3분이란다. 기계 앞에서의 결혼식이라니, 씁쓸함이 앞선다.
결혼 비용 때문에 고민하는 이들에겐 희소식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대한민국에 사는 미혼 남녀에게 말하고 싶다. 결혼식은 삶의 가장 소중한 순간이므로 가족·친지의 축복 속에 치러야 한다고. 사랑하는 사람과 끊임없이 생각을 나누며 살아가는 것이 결혼일 터. 예식이 화려하든 소박하든, 혹은 예식을 치르지 않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함께 살자”라는 약속은 축복이다. 그러니 그 엄청난 소식은 기계가 아닌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
우리말을 살펴봐도 삶에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 수 있다. ‘살다’와 ‘사람’은 어원이 같다. 우리 선조들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과 ‘사람’을 같은 말로 본 것이다. 사람은 옛말 ‘사르다(살다·生)’에 접미사 ‘ㅁ’을 붙여 만든 명사다. 사람을 ‘살아 있는 것’, 즉 생명체로 정의했다. ‘삶’도 ‘살다+ㅁ’ 형태로 만들어졌다. ‘삶’에서 ‘사람’이, ‘사람’에서 ‘삶’이 보이는 이유다.
사람과 사랑을 같은 어원으로 보는 이들도 많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사랑하며 사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일 게다. 참 낭만적이고 아름다운 생각이다. 그런데 ‘사랑’은 ‘생각한다’는 뜻의 한자 ‘사량(思量)’에서 왔다는 설이 일반적이다. 사랑의 가장 기본은 상대방을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이리라.
‘한근태의 재정의 사전’ 저자 한근태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했다. “사랑이란 무엇일까? 사랑의 어원은 ‘사량(思量)’이다. 생각의 양이란 말이다. 대상에 대해 얼마나 생각하는지 총량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명쾌한 정의다. 멋진 풍경을 봤을 때, 맛난 음식을 먹을 때, 눈이 올 때 그 사람이 생각나는가? 그렇다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기쁠 때 생각나는 이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다. 사랑에 해당하는 영어 ‘러브(love)’가 ‘기쁘게 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루브에레(lubere)’에서 유래됐다는 설과 일치한다.
나는 ‘눈에 콩깍지가 씌는 것’을 사랑이라 여긴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이것저것 따지기는커녕, 단점마저도 좋게 보이니 말이다. 물론 콩깍지가 금방 벗겨져 투닥거리는 일도 많겠지만 오랜 세월 함께하다 보면 ‘이해’의 마음이 커져 더 깊은 인연이 될 수도 있다. 콩깍지는 어쩌면 보고도 못 본 척,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이해’, ‘배려’, ‘깨달음’일 수도 있겠다.
당신의 사랑 전선은 어떠신지? 혹여 콩깍지가 벗겨져 사랑하는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밉게 보이진 않는지. 그래도 꼬투리 잡지 말고 눈감아 주시라. 두 손 꼭 잡고 경의중앙선에 올라 맑은 공기 쐬고, ‘문학 자판기’가 선사하는 글을 함께 읽는 것도 좋겠다. 가을이 금세 떠났듯 우리네 인생 역시 사랑만 하기에도 무척 짧다.jsjy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