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준섭의 중국 경제인열전] - 전국시대 ‘재신(財神)’, 백규

입력 2019-05-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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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버리면 나는 취하고, 사람들이 취하면 나는 준다

백규(白圭)는 전국(戰國)시대에 살았던 유명한 상인이다. 지금도 중국인들은 백규를 ‘천하 치생(治生)의 비조(鼻祖)’라면서 ‘인간 재신(財神)’으로 존숭하고 있다. 송나라 진종은 그를 상성(商聖)으로 추존하였다.

백규는 본래 전국시대 위나라 혜왕의 신하였다. 위나라 수도인 대량(大梁)은 황하 가까이에 위치해 있어 항상 홍수의 피해를 받아야 했다. 백규는 뛰어난 치수 능력을 발휘하여 대량의 수환(水患)을 막아냈다. 그러나 위나라가 갈수록 부패해지자 백규는 위나라를 떠나 중산국과 제나라로 갔다. 두 나라 왕들이 모두 그를 자기 나라에 남게 해 치국에 도움을 받고자 했지만 백규는 이를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그는 제나라를 떠난 뒤 진(秦)나라로 들어갔는데, 당시 진나라는 상앙(商鞅)의 변법을 시행하고 있었다. 백규는 상앙의 중농억상 정책에 대해 강력히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므로 진나라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천하를 유력(遊歷)하면서 백규는 점점 정치에 대하여 혐오감이 강해졌고, 마침내 관직을 버리고 상업에 종사하기로 결심하였다.

남들이 보석에 매달릴 때 농부산품 무역

낙양(洛陽)은 일찍부터 상업이 발달했던 도시였다. 낙양 출신이던 백규는 본래부터 상업에 뛰어난 눈을 지니고 있었는데,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전국시대 최고의 대부호가 되었다. 당시 상인들 대부분은 보석 장사를 특히 좋아하였다. 대상(大商) 여불위의 부친도 일찍이 “보석 사업은 백배의 이익을 남긴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백규는 당시 가장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그 길을 택하지 않고 대신 다른 직업을 선택해 농부산품(農副産品)의 무역이라는 새로운 업종을 창조하였다.

백규는 재능과 지혜가 출중하고 안목이 비범하였다. 그는 당시 농업생산이 급속하게 발전하는 것을 목격하고 농부산품 무역이 장차 커다란 이윤을 창출하는 업종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이미 예측하고 있었다. 농부산품 경영이 비록 이윤율은 비교적 낮지만 교역량이 커서 큰 이윤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백규는 농부산품과 수공업 원료 및 상품 사업을 선택했던 것이었다.

하지만 백규는 재산을 움켜쥘 시기에 이르면, 마치 맹수와 맹금(猛禽)이 먹이에게 달려드는 것처럼 민첩하였다. 그는 “나는 경영을 할 때는 이윤(伊尹)이나 강태공(姜太公)이 계책을 실행하는 것처럼 하고 손자(孫子)와 오기(吳起)가 작전하는 것처럼 하며 상앙이 법령을 집행하는 것처럼 한다”라고 말하였다.

백규는 자기만의 독특한 상술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경영원칙을 여덟 글자로 요약하였다. 즉, “인기아취, 인취아여(人棄我取, 人取我予)”였다. 바로 “사람들이 버리면 나는 취하고, 사람들이 취하면 나는 준다”는 뜻이다.

시류에 편승않는 상업경영의 지혜

어느 날 많은 상인들이 모두 면화를 팔아넘겼다. 어떤 상인은 면화를 빨리 처분하려고 헐값으로 팔기도 하였다. 백규는 이 광경을 지켜보고 부하에게 면화를 모두 사들이도록 하였다. 사들인 면화가 너무 많아서 백규는 다른 상인의 창고를 빌려서 보관할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면화를 모두 팔아넘긴 상인들은 이제 모피를 사들이느라 혈안이 되었다. 당시 누구로부터 나온 얘기인지는 정확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모피가 크게 팔리게 될 것이고 겨울에 사람들이 아마도 시장에서 살 수도 없을 것이라는 소문이 크게 돌았었다. 그런데 백규의 창고에는 좋은 모피가 보관되어 있었다. 백규는 모피의 가격이 더 오를 것을 기다리지 않고 모피를 몽땅 팔아 큰돈을 벌었다. 그 뒤 면화가 큰 흉년이 들었다. 그러자 면화를 손에 넣지 못하게 된 상인들이 면화를 찾느라 야단법석이 되었다. 이때 백규는 사들였던 면화를 모두 팔아 다시 큰돈을 벌었다.

이러한 백규의 경영 원칙은 일종의 상업경영의 지혜였으며, 그것은 맹목적으로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 것을 의미하였다.

▲지금도 중국인들로부터 ‘천하 치생(治生)의 비조(鼻祖)’로 존숭받는 전국시대의 ‘재신(財神)’ 백규. ‘인기아취, 인취아여(人棄我取, 人取我予)’ 즉 “사람들이 버리면 나는 취하고, 사람들이 취하면 나는 준다”는 그의 경영원칙은 일종의 상업경영의 지혜였으며, 그것은 맹목적으로 시류에 편승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출처 바이두

박리다매로 백성의 삶을 도와

백규가 살던 당시에 곡물은 시장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상품이었고, 소비자의 대부분은 평민들이었다. 일상생활에서 평민들의 요구는 그다지 높지 않았고 단지 배만 곯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러므로 평민들은 돈을 아끼기 위하여 값이 싸고 질이 약간 떨어지는 곡물을 샀다. 이러한 상황에서 상인의 입장에서 보자면, 비축해야 할 곡물은 하등급의 곡물이었다.

하지만 백규는 그러한 보통 상인들의 안목을 과감히 뛰어넘었다. 백규는 자신이 물건을 판매할 사람들이 대부분 평민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생활을 가혹하게 만들지 않기 위하여 언제나 박리다매의 경영 방식을 운용하면서 가격을 높이지 않았다. 대신 상품 유통 속도와 판매 속도를 빨리 하는 방법으로 더욱 많은 이익을 얻었다.

반대로 당시 대부분의 상인들은 커다란 이익을 손에 넣기 위하여 매점매석을 일삼고 일시에 가격을 높였다. 그러나 백규는 식량이 부족할 때 절대로 곡물 가격을 올리지 않았다. 그는 박리다매가 장기적으로 부를 쌓는 방법이라는 상인 경영의 기본 원칙을 견지하면서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는 상인은 결코 큰돈을 벌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농민·수공업자 위한 ‘인술 경영’

백규는 곡물이 익어가는 계절이면 양곡을 사들이고 비단과 칠(漆)을 팔았으며 누에고치가 생산될 때면 비단과 솜을 사들이고 양곡을 내다팔았다. 백규는 수확의 계절이나 풍년이 되었을 때 농민들이 곡물을 대량으로 내다팔게 되면 곡물을 사들이고, 이때 비단과 칠기 등을 비교적 부유한 농민들에게 판매하였다. 반대로 경기가 좋지 않을 때는 양곡을 팔고 적체된 수공업 재료와 산품을 사들였다. 백규가 말하는 ‘준다, 여(予)’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우대하여 넘긴다는 의미였다.

간사한 간상(奸商)들은 물건이 넘칠 때 일부러 더욱 압박을 함으로써 가격을 최저치로 끌어내린 뒤 비로소 사들였다. 하지만 백규는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높은 가격에 사들였다. 시장에 물건이 귀해졌을 때 간상들은 매점매석했지만, 백규는 오히려 다른 사람보다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여 사람들의 수요에 맞췄다.

백규의 이러한 경영방식은 자신의 경영 주도권을 보장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윤도 풍부하게 얻는 결과를 만들었다. 나아가 객관적으로 상품의 수요공급과 가격을 조정함으로써 농민과 수공업자의 이익을 보장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방식을 가리켜 백규는 ‘인술(仁術)’이라고 불렀다.

욕망 절제하고 일꾼들과 동고동락

백규는 고난을 견딜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거부가 되었을 때도 그가 축적한 재부(財富)를 확대재생산 분야에 투자하면서 자신은 “음식을 탐하지 않았고 욕망의 향수를 절제하며 기호(嗜好)를 억제하고 극히 소박한 옷만 입으면서 일꾼들과 동고동락하였다.”

백규의 이러한 상업 사상은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근대 중국의 유명한 민족자본가인 영종경(榮宗敬)은 백규의 ‘인기아취(人棄我取)’의 경영 원칙을 준수하였으며, 저명한 화교 기업가인 진가경(陳嘉庚)은 ‘인기아취, 인쟁아피(人棄我取, 人爭我避)’의 경영 방침을 세웠는데, 이는 백규 사상의 계승 발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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