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숭호의 키워드] 무저갱(無底坑)의 공포 - 바닥이 안 보여서 더 무섭다

입력 2019-02-26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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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전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발아래 땅이 꺼지면 어떻게 될까? ‘싱크 홀(Sink Hole)’ 사고를 연상하면 될까? 걷거나 차를 타고 가다가 갑자기 땅이 꺼져 그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우리를 덮칠 공포는 상상만 해도 등골이 서늘하다. 싱크 홀의 구멍이 깊어 떨어지는 시간이 길수록 공포는 더욱 커질 것이다.

여러 종교가 전하는 숱한 지옥 중 ‘무저갱(無底坑)’이 제일 무서운 것도 그래서다. 무저갱은 바닥이 없는 암흑의 구덩이다. 심연(深淵)이다. 무저갱에서는 공포에 짓눌린 채 끝없이 떨어져야 한다. 무저갱에 떨어진 사람은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1863~1944)의 걸작, ‘절규’의 주인공보다 훨씬 더 큰 목소리로 울부짖을 것이다.

내가 무저갱 같은 구덩이와 그 속으로 떨어지는 공포에 집착하는 것은 37년 전인 1982년 4월에 일어난 서울 현저동 지하철 3호선 공사장 붕괴를 목격했기 때문이다. 암반을 깨트리는 발파 진동으로 공사장 벽면의 철 구조물(H빔)이 휘어지고 그 위에 깔아놓은 수백 미터 길이의 복공판(覆工板)이 연쇄적으로 무너진 사고였다. 복공판 위를 지나던 시내버스와 공사장 중장비가 수십 미터 아래로 떨어졌고 인부 10명이 숨졌다. 버스 승객 30여 명도 크게 다쳤다.

사고 발생 직후 현장으로 달려간 나는 동료들과 현장 부근 인도 위에서 취재를 하다 바로 눈앞에서 시작된 2차 붕괴 장면을 생생히 목격했다. 첫 번째 붕괴의 여파(지진으로 따지면 여진!)가 불러온 2차 붕괴는 남은 복공판을 마저 무너뜨렸으며 1차 붕괴 때 추락을 모면했던 건설 중장비들과 산더미처럼 쌓여 있던 무거운 H빔이 내 발 아래에서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우수수 저 깊이 시커먼 바닥으로 쏟아져 내렸다. 육중한 중장비들과 굵은 철강 기둥 더미는 낙엽 같았고 성냥개비 같았다.

▲원통형 놀이기구 ‘로토르’ 속의 사람들.
예전 외국의 놀이공원에서 인기가 높았다는 ‘로토르(Rotor)’는 사람들이 무저갱의 공포를 느끼도록 고안된 탈 것이다. 사람들이 다 타면 원통형인 로토르는 통돌이 세탁기처럼 돌기 시작한다. 원통의 회전이 시작되면 원통 바닥이 벽으로 천천히 들어간다. 서 있을 곳이 점점 줄어들면서 사람들은 벽면으로 다가서게 되는데 회전 속도가 최고에 달하면 바닥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원심력을 받아 벽에 바짝 달라붙는다. 원통의 회전 속도는 분당 33회전. 사람들이 중력의 3배나 되는 압력을 받게 되는 속도라고 한다. 이 압력 때문에 사람들은 벽에서 떨어지지는 않으나 발아래가 뚫려 있다는 현실에 직면해야 한다. 사진을 보면 재미있다고 웃는 사람들도 있지만 겁에 질려 뭉크의 그림 속 주인공 같은 표정으로 울부짖는 사람도 있다.

1940년대 독일의 놀이공원에 처음 나타나 공포체험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높은 인기를 누리다 롤러코스터나 자이로드롭 등 공포를 더 재미있고 더 자극적으로 자아내는 수많은 신식 탈 것들에 밀려 지금은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몇몇 놀이공원에만 남아 있다는 로토르. 직접 타보기는커녕 실물을 본 적도 없는 로토르를 오랜 시간 인터넷에서 찾아본 건 우리 사회의 기반인 자유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는 생각에서다. 여권이 판결 불복, 법원 무시로 민주주의의 근간인 법치를 흔들자 제1 야당은 헌재의 탄핵 결정을 부정하고 나섰다. 여권은 제1 야당의 5·18 비방을 막겠다며 표현의 자유를 억제할 수밖에 없는 ‘5·18 비방 처벌법안’을 내놓았다. 이런 것들이 자유민주주의를 흔드는 게 아니면 뭔가.

내가 딛고 있는 발판이 로토르의 발판처럼 좁아지고 있다. 나는 로토르의 가장자리로 밀려나 마침내는 통돌이 세탁기 속 빨래처럼 바짝 짜인 채 아무렇게나 구겨져 벽에 달라붙어 있는 내 모습을 본다. 통돌이 속도가 빨라지면서 모든 것이 지하철 3호선 공사장 복공판처럼 삽시간에 무너지는 환상, 너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저 아래 깊은 곳으로 추락하는 환상도 볼 수 있다. 놀이공원 로토르는 속도를 천천히 줄여 벽에 달라붙은 사람들을 탈 없이 내려놓았다. 내가 타고 있는 대한민국이라는 이 로토르, 이 통돌이도 천천히 멈출 수 있을까? 아니, 이대로 가다가는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가속이 붙어 종국에는 산산조각 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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