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측우기의 놀라운 과학성

입력 2018-12-13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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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부터 날씨와 기후는 우리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쳐왔다. 특히 농사는 날씨로 인해 풍년과 흉년이 좌우될 정도로 기후에 민감한 분야였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펴보면 농업 중심의 경제를 이룬 조선이 당시 기상기술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빗물을 재는 방법인 ‘측우기(測雨器)’의 발명이다.

우택(雨澤)은 ‘비의 은혜와 덕택’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비가 내려 반갑고 고마운 농민의 마음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실제로 이 우택이 적당한 시기에 적절히 내려줘야 농사 모내기를 성공적으로 마칠 수 있었다.

세종7년(서기 1425년) 4월 13일의 기록을 보면 가뭄이 계속되는 와중 평안도 숙천과 경기도 남양·안산 등 여덟 고을에 비가 왔다고 보고돼 있다. 이에 세종은 여러 도·군·현에 명령해 “비가 오거든 물이 땅에 스며들어간 깊이를 상세히 기록하여 급히 보고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젖은 땅을 파 수분이 스며든 정도를 파악하는 입토조사를 행하게 되는데, 이러한 측우 방법은 토양의 종류와 논의 위치, 조사 시점에 따라 큰 차이가 났기 때문에 결과를 신뢰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 빗물을 재는 도구, 측우기가 발명되었다. 세종 23년(서기 1441년) 4월 29일의 기록에 의하면, 세종의 아들 문종은 가뭄을 근심하여 비가 올 때마다 땅을 파 젖어 들어간 정도를 살펴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비가 온 적확한 양을 파악할 수 없어 구리를 부어 그릇을 만들고는 궁중(宮中)에 두어 그릇에 괴인 빗물의 정도를 실험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측우기이다.

조선시대 측우기는 비를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도구로서 서양 근대과학 개념의 관측기기이다. 서양은 1639년 이탈리아 카스텔리(Benedetto Castelli)가 자신의 스승인 갈릴레오에게 측우기 제작에 대해 편지를 쓴 것이 유럽 최초의 언급이다. 게다가 실제로 측우기가 제작된 것이 아니라 그저 빗물을 재는 방법을 글로 쓴 것이다. 조선의 측우기가 서양보다 200여 년 앞서 발명된 것이다.

현재 세계 각국에서 보편적으로 채택하여 사용하는 강우량계의 지름은 20cm이다. 그런데 기상청 소장품인 금영측우기(錦營測雨器ㆍ보물 제561호)의 지름은 15.3cm로 현재 사용 중인 강우량계의 구경 크기에 가장 근접한다. 또한, 금영측우기의 동그란 모양의 입구는 유출입 되는 비의 양의 오차를 최소화하는 구조로 설계됐다. 이는 세계기상기구(WMO)가 권고하는 측우기의 제작 형태 및 관측 지침 권고와 일치한다.

세계 기상학계는 조선시대 측우기가 1400년부터 관측을 시작했다고 인정하고 있다. 유엔 산하 전문기구인 유네스코는 1997년에 조선왕조실록을, 2001년에 승정원일기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인정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앞서 언급한 측우기의 발명 동기 외에도 측우기 전국 우량 관측망, 측우기 활용 내용과 함께 당시의 강수량 기록이 남아있다. 승정원일기에는 177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날씨현상표시와 일(日) 단위의 측정시간구간, 그리고 함께 관측된 양의 기록이 남아있어 기후학자들의 연구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측우기의 가치는 제작 시기나 유일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후 패턴을 알 수 있는 기록의 근간이 됐기에 최초의 세계 우량 관측기기라는 상징성뿐만 아니라 세계 기후변화의 전무후무한 관측 결과를 남긴 귀중한 자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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