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이코노미] '국가부도의 날'이 주는 기시감…"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고, 실업이 일상인 세상"

입력 2018-11-29 13:47

  • 작게보기

  • 기본크기

  • 크게보기

▲금융맨 윤정학(유아인 분)은 외국인들의 투자 철수 조치와 잇따른 경제 악화 신호에 국가부도가 가까이 왔음을 느낀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경제 호황에 취해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저는 이 나라가 파산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너 같은 녀석들보고 뭐라고 하는지 알아? 음모론자! 새끼야."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투자자들을 모은 금융맨 윤정학(유아인 분)은 국가 부도에 역배팅 해, 막대한 승리를 거둔다. 동시에, 그릇공장 사장 갑수(허준호 분)는 백화점으로부터 받은 어음이 하루아침에 휴짓조각이 되는 경험을 한다.

▲한국은행 통화정책 팀장 한시현(김혜수 분)은 나라 안팎에 수많은 경고 신호를 무시한 결과, 국가부도가 다가올 것을 직감한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갑작스러운 IMF 외환위기 사태에 무방비 상태로 직격타를 맞은 평범한 시민들과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정치인들을 대비시키며 그 충격을 극대화한다.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 분)은 끊임없이 국가 부도를 경고한다. 그는 "지난 8월부터 외국 자본은 한국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고, 대부분 해외 투자자들은 일제히 만기 연장을 거부하고 있다"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제출한다. 하지만 재정국 차관은 "주말에 골프 한 번 나가야지?"라는 태평한 소리만 내뱉는다.

▲정부는 일각에서 제기되는 경제 위기설에 대해 한국경제는 기초가 튼튼하다며 위기설을 일축했다. 국민들은 뉴스와 신문을 통해 정부의 발표를 접하고, 그대로 신뢰한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대한민국은 IMF 외환위기 직전, 국민 85%가 자신을 중산층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경제 호황을 누렸다. 당시 우리나라는 수출주도형 국가로, 해외에서 습득한 제조업 기술로 물건을 만든 뒤, 다른 국가에 싸게 수출하는 전략을 취했다. 수출량은 매해 증가했고, 기업은 계속해서 사업을 확장했다.

은행들은 기업들의 무리한 사업 확충에도 아무런 심사 없이 약속증서인 '어음'을 남발했다. 허술한 금융체계로 모든 기업과 은행은 빚과 빚으로 아슬아슬하게 얽혔다. 부패한 정치인들은 로비를 받으며 이런 상황을 방치했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기업들은 계속 공장을 짓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빌렸지만, 시장에 공급 과잉이 생기면서 더 이상 제품을 팔 수 없게 됐다. 기업들이 은행에 돈을 갚지 못하자 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의 재정난이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국제 정세 또한 불리하게 작용했다. 미국의 금리 인상과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잇따른 외환 위기는 외국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회수하게 만들었다.

결국, 한국에도 외환 위기가 찾아온다. 국가의 외환이 바닥나자 다른 나라에서 빌려 온 돈을 제때에 갚지 못했다. 기업들의 도산 및 파산이 이어졌고, 수많은 실직자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당시 외환 위기는 30년간 급하게 성장해 온 경제 발전 과정에서 쌓이 문제점이 폭발한 결과이기도 했다. 기업들의 국제 경쟁력 약화, 수출 감소, 기술 개발 소홀,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 정부 등의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국가부도로 그릇 공장 사장 갑수(허준호)는 백화점으로부터 받은 어음이 하루 아침에 휴짓조각이 되는 경험을 한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정학은 투자자들에게 "이미 국가 부도가 시작됐는데도, 정부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고 있지 않습니다"라면서 "저는 그 무능과 무지에 투자하겠습니다"라고 외친다. 이 외침은 투자자들에 대한 외침이자 동시에 국가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을 초래한 국가에 대한 비난이다.

영화는 국가 부도의 복합적 요인 중에서도 부패한 정치권을 조명한다.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이 "지금 나라 경제가 위험하다는 경보를 울려야죠"라고 말하자 재정국 차관은 "혼란만 가져올 텐데 왜 위기를 알려야 하지?"라며 오히려 반문한다. 이어 "대선이 바로 코앞인데, 국가 경제가 위기라고 말하는 것은 야당 후보한테 쓸데없는 시빗거리만 제공하는 것"이라며 한시현의 주장을 묵살한다.

영화는 1997년 IMF 외환위기 당시를 생생하게 구현하지만, 영화를 보는 관람객들은 2018년 현재를 보는 듯한 기시감을 느끼게 된다. 유치원 원장들의 표를 얻기 위해 비리 유치원을 감싸는 정당, 교회의 지지를 받기 위해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의원, 한부모가정을 위한 예산을 지역구 다리 건설 예산으로 가져가는 의원. 표를 위해 비상식적인 행보를 일삼는 정치권의 행보는 데칼코마니처럼 과거의 모습 그대로 현재에 투영된다.

▲부패한 정치권은 국가부도가 시작됐음에도, 곧 다가올 선거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생각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국민들은 그로 인한 피해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지고, 실업이 일상이 되는 세상. 그런 세상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한시현은 IMF 구제 금융이 초래할 결과를 이같이 예측한다. 구제 금융을 내세워 한국 경제에 무리한 요구를 하고, 그 요구들로 인한 피해는 모두 서민이 지게 될 것을 설명한다. 공기업의 민영화와 자본시장의 추가 개방 등 IMF가 요구했던 조건들은 국가의 빚은 줄였지만, 서민의 부채는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빈부 격차, 고용 불안, 청년 실업. 우리는 아직 IMF 외환위기 후유증을 겪고 있다. 영화는 과거의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현재의 우리가 무엇을 해야할 지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은 금융맨, 평범한 소시민 등 시대상을 반영한 현실적인 캐릭터로 당시 외환위기를 겪었던 세대들의 기억 속 공감대를 자극한다.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배우 김혜수는 영화 시나리오를 받고 "피가 역류하는 느낌이었다"라고 말했다. 1997년 국가부도의 날을 온몸으로 부딪힌 시민들 역시 IMF 외환위기로 피가 역류하는 느낌의 고통을 고스란히 견뎌냈다.

2019년은 IMF 외환위기가 터진 지 24년째 되는 해다. 내년에는 국가부도의 날에서 기시감이 아닌 '위화감'을 느끼는 해가 되길 바라본다.

  • 좋아요0
  • 화나요0
  • 슬퍼요0
  • 추가취재 원해요0
주요뉴스
댓글
0 / 300
e스튜디오
많이 본 뉴스
뉴스발전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