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 손편지] “당신하곤 안 살아”

입력 2018-09-20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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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모님은 살아생전 사이가 참 좋았다. 아버지는 퇴근길에 엄마를 불러내어 동네 어귀에 있던 단골 빈대떡 집에서 막걸리를 한잔씩 걸치곤 하셨다. 평소엔 말씀이 거의 없던 아버지는, 술기운이 적당히 돌면 연신 엄마를 부둥켜안으며 “당신 없인 못 살아”를 외치셨다. 그런데 정작 술이 곤드레만드레가 되면 “당신하곤 안 살아”를 선언하는 바람에 우리 모두를 어리둥절하게 하셨다. 취중진담(醉中眞談)이라는데 어느 쪽이 진심인지 여쭈어보면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하셔서 우리는 끝내 아버지의 본심(?)을 알아채지 못했다.

두 분은 봉래초등학교 교사 시절에 만나 1952년 전쟁 통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사진 속 아버지는 제비 꼬리 모양의 예복을 입었고, 엄마는 고운 한복에 신식 면사포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다. 아버지가 엄마에게 건넨 첫 말씀은 “도장이 (지저분하니) 소제(掃除) 좀 잘하라”라는 타박이었단다. 연애 시절 엄마가 “볼 만한 영화가 들어왔으니 함께 가자”고 데이트 신청을 하면 아버지는 “나는 지난주에 보았으니 당신 혼자 가시오” 하셨단다.

무심하고 무뚝뚝한 아버지의 어디가 좋아 결혼하셨느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그 시절 아버지는 영화배우 안성기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인물이 좋았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엄마 눈에 씐 콩깍지가 여간 두터웠던 것이 아니었나 보다.

엄마와 아버지가 결혼하게 된 데는 외할머니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 경기여고를 나온 재원(才媛)이었건만 한량 남편을 만난 데다 호된 시집살이를 감당해야 했던 외할머니는, 이북에서 홀로 내려온 사윗감을 보는 순간 ‘내 딸은 시집살이 안 해도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래서 애지중지 아끼던 맏딸을 일가친척 하나 없는 아버지에게 덥석 안기셨다는 거다.

8남매의 맏이인 아버지는 열일곱에 “잠깐만 남쪽으로 피신해 있으라”던 당신 어머님 말씀만 믿고 홀로 남으로 내려온 이후 눈을 감을 때까지 가족들과 영영 이별하고야 말았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명절마다 온갖 정성을 다해 상을 차렸던 이유는 아버지의 절절한 외로움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공감하셨기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하여 그리하셨던 것 같다.

매해 추석이면 쌀을 곱게 빻아 알맞게 반죽한 후 깨, 서리태(콩), 녹두로 만든 소를 넣어 송편을 빚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엄마는 유난히 송편을 예쁘게 빚으셨다. 배를 통통하게 빚어낸 엄마표 송편보다 더 예쁜 모양의 송편은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송편 예쁘게 빚으면 예쁜 딸 낳는다”는 덕담을 아끼지 않으셨던 할머니들, “딸 자식들 인물이 지 어미만 못하다”고 타박하긴 했지만, 엄마 솜씨만큼은 기꺼이 인정해주셨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이십 년 가까워오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는 십 년이 훌쩍 넘었건만, 두 분께서 지금도 후손들을 돌봐주시고 있는 것만 같아 감사하기가 이를 데 없다. 꿈에 두 분의 우울한 모습을 뵈면 필시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거꾸로 환하게 웃는 모습을 만나면 좋은 일이 생기는 게 종종 있으니 말이다. 당신들 친손녀는 꿈에 할아버지께서 기분 좋게 웃는 모습을 본 후 이틀 지나 팀장 승진 소식을 들었단다.

올 추석엔 환한 보름달을 바라보며 두 분이 나누셨던 사랑, 자식을 위해 베풀어주셨던 사랑을 곱씹어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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