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21. 뱀과 추리소설의 여왕

입력 2018-07-2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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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온도가 연일 35도를 넘는 폭염이 한창이다. 문제는 그 열기가 밤까지 계속되어 잠을 이룰 수 없을 만큼 덥다는 것이다. 예전엔 열대야 같은 것은 모르고 지냈다. 수돗가에 엎드려 어머니가 뿌려주는 물 두어 바가지와 추리소설 몇 권이면 충분했다. 추리소설 하면 애거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 1890~1976) 여사의 소설이 제격인데 ‘오리엔트 특급 살인’,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등은 몇 번 읽어도 재미있다.

그런데 이 추리소설의 여왕은 만년필 세계에서도 무시하지 못할 영향력이 있다. 그가 유별나게 만년필을 좋아했기 때문일까? 그러나 수많은 작품 중 만년필이 나오는 장면은 거의 없다. 그나마 ‘3막의 비극’에 한 줄 정도 나온다. “만년필이란 참으로 말썽을 부리는 물건이야. 막상 쓰려고 하면 나오지 않거든.” 이 정도가 전부이다.

800쪽이 넘는 자서전을 봐도 만년필에 관련된 것은 한두 단어 정도이다.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는 언니가 물려준 타자기로 대부분의 글을 썼다. 즐겨 하지 않았는데 웬 영향력? 아이러니하게도 만년필 때문이다.

독일 회사 몽블랑사(社)는 1992년 만년필에 작가의 이름을 붙여 해마다 한정판을 내놓은 것이 성공하여 만년필 세계의 주도권을 잡는다. 그 첫 번째는 ‘노인과 바다’의 헤밍웨이였고 이 시리즈의 두 번째가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였다.

헤밍웨이 만년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애거사 크리스티 만년필도 최고의 걸작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이 1926년 출간된 데 맞춰 1920년대 만년필을 기본으로 삼았다. 바뀐 것은 편리하게 잉크를 넣을 수 있게 요즘 방식으로 바꾸고 당시 선택이었던 클립을 끼운 것이다. 바로 이 클립이 신의 한 수였다. 뱀 한 마리가 만년필을 칭칭 감고 머리를 아래로 내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인상적인 클립은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와 기가 막히게 잘 어울렸다. 그의 추리소설 80여 편 중 절반 이상이 잔인한 살인 묘사가 없는 독(毒)을 이용한 살인이었기 때문이다. 독 하면 떠오르는 뱀, 독을 이용하여 살인 장면을 연출하는 작가. 그 작가를 표현하는 데 뱀만 한 것이 없던 것이다.

▲1993년 몽블랑 작가 시리즈 애거사 크리스티.
그렇다면 130년이 넘는 만년필 역사에 뱀을 등장시킨 것이 이때가 처음일까? 사실 원조는 몽블랑보다 역사가 깊은 미국의 워터맨과 파커이다. 1890년대 후반부터 1910년 초반까지 만년필은 은이나 금으로 문양을 낸 것과 전복이나 진주조개를 잘라 몸통에 붙인 것 등 화려한 작품이 유행했는데 스네이크로 불리는 이 만년필들도 이런 것 중 하나였다.

원조가 어찌되었든 애거사 크리스티 만년필은 크게 성공하였다. 몽블랑의 위상이 더욱 탄탄해진 건 물론이다. 이에 자극을 받았는지 아니면 뱀 만년필만큼은 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알 수 없지만, 1997년 파커는 몽블랑처럼 1900년대 것과 모양은 같게 요즘의 잉크 넣는 방식으로 바꾸고, 몽블랑의 패키지보다 더 화려하게 파커 스네이크 한정판을 내놓았다.

하지만 이것은 성공하지 못했다. 아무리 잘 만들었다 하더라도 그냥 뱀이 감겨 있는 만년필일 뿐, 등목을 하고 평상(平床)에 누워 회색 뇌세포를 가진 조그만 탐정(에르퀼 푸아로)의 추리를 감탄했던 예전의 추억 같은 것들은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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