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M&A로부터 기업 지키기와 재벌 특혜 사이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 엘리엇이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에 제동을 걸자,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 수단을 제도적으로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국제 법제사법위원회 소속 윤상직 자유한국당 의원은 최근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 필·Poison Pill)’과 ‘차등의결권’ 도입을 골자로 하는 상법개정안을 발의하겠다고 예고했다. 또 16일에는 한국상장회사협의회와 코스닥협회가 “제도적 방어수단 도입이 시급하다”고 주장하며 ‘경영권 방어제도 도입 촉구를 위한 상장회사 호소문’을 발표, 이 같은 흐름에 힘을 실었다.
궁금증① ‘포이즌 필’과 ‘차등의결권’은 무엇 = 독약을 뜻하는 ‘포이즌 필’은 기업이 적대적 인수·합병(M&A)이나 경영권을 침해당하는 경우 기존 주주들에게 시가보다 싼 가격에 지분 매수가 가능한 권리를 부여하는 제도다. 기존 주주들이 새 주식을 싼값에 사들이게 되면 공격을 시도하는 입장에서 확보해야 하는 주식도 늘어나게 돼 충분한 의결권을 갖기 어렵게 된다. 기업을 뺏으려는 입장에서 ‘독약’이 되는 주식발행권을 회사의 정관에 명시한다는 의미에서 ‘독약 처방’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함께 논의되고 있는 차등의결권은 경영진이나 최대주주에게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이 경우 ‘1주 = 1의결권’이란 공식이 적용되지 않는다. 대주주로서는 자신이 가진 주식에 상대적으로 많은 의결권이 부여돼 있어 안정적인 경영권을 기대할 수 있다. 한 발짝 더 나아가면 한 주만으로도 주주총회 의결에 절대적인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황금주’도 발행할 수 있게 된다.
궁금증② 경영권 방어수단, 해외 현황은 = 두 제도는 그간 ‘1주 1의결권’ 원칙에 반하는 데다, 대주주 권한 남용이 우려된다는 지적에 아직 국내에 도입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국, 일본, 프랑스 등 주요국에서는 활발하게 사용되고 있다. 일본은 2005년 ‘신주예약권’으로 이름 붙인 일본식 포이즌 필 제도를 도입했다. 일본증권거래소에 상장된 기업 중 10%가 넘는 기업들이 이 제도를 도입했으며, 그 비중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미국 역시 소더비, 허츠, JC페니, 세이프웨이, 아메리칸어패럴, 에너자이저 홀딩스 등 많은 기업들이 포이즌 필로 경영권 방어에 활용하고 있다.
차등의결권의 대표적인 사례가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이다. 알파벳 주식은 주당 1표의 의결권을 갖는 보통주 A형과 공동 창업자가 보유한 B형으로 나뉜다. B주에는 주당 10표의 의결권이 부여돼 있어 10배의 의결권을 갖는다. 페이스북 역시 주당 10표의 의결권을 가진 B주 85%를 창업자가 갖고 있다. 미국 소셜게임회사 징가는 A주보다 의결권이 7배 많은 B주와 70배 많은 의결권을 부여한 C주 등으로 3단계 주식을 발행하고 있다.
궁금증③ 수면 위에 오른 배경은 = 2003년 영국계 헤지펀드 소버린자산운용과 SK그룹의 경영권 분쟁은 한국 재계가 기업 경영권 방어의 중요성을 체감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당시 SK그룹의 지주회사 1대 주주로 등극했던 소버린은 2005년 7월 보유지분 전량을 처분, 9437억 원의 차익을 얻고 한국을 떠났다. 기업사냥꾼의 ‘먹튀’에 한국 기업이 맥없이 당했다는 비판이 줄을 이었다.
기업들은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을 반대했던 엘리엇이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에 또다시 반대 목소리를 내는 것을 보며 2003년 소버린 사태를 떠올리고 있다. 특히 국내 기업들은 이번 사안을 외국 헤지펀드의 공세가 거세지는 신호탄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간 우리나라에의 대기업집단의 경영권은 복잡한 순환출자 구조의 덕을 본 측면이 있다. 이번 정부의 재벌개혁 기조에 따라 순환출자 구조를 해소하는 만큼, 경영권 방어를 위한 장치도 강화되어야 한다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궁금증④ 국내 경영권 방어수단의 현황은 = 현행법상 적대적 M&A 시도가 발생하면 △주주총회 소집을 통한 재무구조 개편이나 주요 자산 매각 △회사 분할을 비롯한 자산 구조조정 △자기주식의 취득 한도 확대 등의 방어 장치를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비용과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데다, 주가 조작 등 위법성 논란이 제기될 가능성이 있다. 또한 기업의 재무구조가 악화될 수 있다는 위험 부담도 있다.
현재로서는 자사주를 늘려 지배력을 스스로 강화하는 것이 유일한 대응책이라는 게 재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유통 주식수를 줄이고 매수 비용을 증가시켜 적대적 매수자의 지분 매집을 사전에 방지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주주에게 환원될 이익은 줄어들 수밖에 없고, 유보자금이 생산적 기업 활동에 쓰이지 못하는 점은 부정적인 요인이다.
이 때문에 현재보다 강력한 경영권 방어 수단이 필요하다는 지적은 지속 제기되어 왔다. 한국경제연구원은 2015년 보고서에서 “국내 우량기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율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투기자본에 의한 적대적 M&A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면서 “이를 방어하기 위해 포이즌 필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궁금증⑤ 부작용은 무엇인가 = 포이즌 필은 일찍부터 도입이 검토된 제도다. 2009년, 2008년 법무부가 경영권방어법제 개선위원회를 구성한 뒤 이듬해인 2009년 포이즌 필을 도입하는 상법 개정안이 입법예고되기도 했다.
하지만 ‘주주평등의 원칙’에 어긋나며 재벌기업들이 경영권을 악용할 가능성이 많아 경제민주화를 후퇴시킨다면서 시민단체와 정치권이 반발했다. 이 때문에 같은 해 국회의 반대로 도입이 무산된 뒤, 제대로 된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 기업 역시 ‘재벌 특혜’라는 따가운 여론을 우려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국내 현실에 맞는 ‘한국형 포이즌 필’ 도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된다. 문상일 인천대 교수는 “포이즌 필 제도는 기업 가치 유지와 일반 주주들의 이익 극대화에 효과적”이라며 “다만 지배주주나 경영진의 사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지 못하도록 적법성 판단 기준을 명확하게 설정해야 하고, 사전적·사후적인 통제 장치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