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멈출 때를 아는 것

입력 2018-04-30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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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청쿵 그룹 회장 리카싱은 아시아 최고 갑부다. 그의 재산은 약 330억 달러(약 35조 원)에 달한다. 그런 그의 좌우명이 '지지(知止)'다. 멈춤을 안다는 뜻이다. 유가 경전 <대학>에는 '멈춰야 할 곳을 알아야 자리를 잡고, 자리를 잡아야 고요해진다(知止而後定, 定而後靜)'라는 구절이 나온다. 목표에 달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마땅히 멈춰야 할 곳, 자기만의 윤리적 선을 정해야 한다는 의미다.

최근 만난 한 검찰 출신 변호사가 리카싱을 언급하며 자신의 좌우명을 '지지'라 했다. 그는 "권력을 맛보면 그만두기 쉽지 않다고 하더라. 지금 수사받는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 것 같다"며 옛 동료들을 안타까워했다.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검찰에서 '잘 나갔던' 인사들이 연달아 수사 선상에 올라 구속됐다. 박근혜 정부 때 국가정보원에 파견돼 검찰 댓글 수사·재판을 방해한 혐의로 장호중 전 검사장이 구속돼 재판을 받고 있다. 이명박 정부 당시 청와대 민정2비서관을 지낸 김진모 전 검사장도 구속 기소됐다. 그밖에 구속된 검사가 여럿이다. 이 변호사는 "나는 오히려 안 풀린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잘 풀린 걸 수도 있을 것 같다"며 멋쩍어했다.

이른바 '적폐 수사'에 연루된 공무원들이 주장하는 내용이 엇비슷하다. 그들은 "시키는 대로 했다. 위법한 일인지 몰랐다"고 한다. 하지만 '몰랐다'고 해서 법적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들을 보며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을 떠올렸다. 그러나 아렌트는 유대인 학살 주범인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생각하지 않은 책임'을 물었다.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을 져버린 것도 책임을 져야 한다.

게다가 최근 연구자들은 구조 속에서 위법한 명령에 동참하는 이들의 내면 상태에 집중한다. 이들은 자신의 출세욕과 경제적 이익 등을 이유로 악행을 저지른다. 단순히 사고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합리화하고 적극적으로 협조한 셈이다. 만약 청와대로, 국정원으로 파견 갔던 이들이 이같은 욕망을 포기하고 위법한 지시에 '아니다'라고 말하고 멈췄다면 어땠을까. 물론 '높은 자리'를 보장받지 못했겠지만, 적어도 역사의 처벌을 피하고 사람들 앞에 떳떳했을 테다. 멈출 때를 아는 것은 이렇게나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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