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진의 만년필 이야기] 아날로그의 멋과 맛

입력 2018-04-06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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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본가(本家) 근처에서 일을 마치면 어머니와 식사를 한다. 냉장고에서 뭔가가 나오고 “똑 똑 똑” 칼이 도마에 닿는 소리가 들린다. 호박이나 감자가 썰리는 것이다. 냉이와 달래가 들어가는지 된장찌개의 향이 더 구수하고 향긋하다. 생선 한 토막이 구워지고 묵은 김치도 보기 좋게 접시에 담긴다. 금방 지은 밥과 따듯한 국까지 상에 오르면 어머니 표 집밥이 완성된다.

이런 한 끼는 버튼 눌러 주문을 하고 순서를 기다려 혼자 먹는 햄버거와는 다른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좋은 한 끼일까? 당연히 어머니 밥상이다. 중성지방과 나트륨 이런 것을 따지기 전에 좋은 한 끼는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다. 음식이 만들어질 때 나는 소리와 냄새,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의 즐거운 대화도 있어야 한다.

치지직 치지직거리다 채널이 맞으면 빨간 불이 들어오고 DJ의 음성과 함께 고운 음악이 흘러나온다. 라디오의 매력이다. 최근 몇 개월간 마음에 드는 라디오를 찾기 위해 고생했다. 세운상가 골목도 다녀보고 동묘 벼룩시장도 기웃거려 보았지만 마음에 드는 것을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요즘 라디오는 반질반질하지만 들어 보면 너무 가벼워 제대로 만든 물건 같지 않았다.

그런 선입견 때문인지 소리도 깊고 부드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진공관은 아니더라도 트랜지스터가 들어 있는 옛날 라디오를 갖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라디오 중엔 온전한 것이 별로 없었다. 대부분 소리가 나오지 않거나 소리가 나온다 하더라도 어디 한 곳이 움푹 들어가 있거나 귀퉁이 한쪽은 꼭 깨져 있었다.

그러길 한두 달 어렵사리 웬만한 것을 구할 수 있었다. 라디오를 구해 돌아오는 길에 동행한 젊은 친구가 내게 묻는다. “소장님, 차 안에 있는 라디오를 들으시면 되지 왜 이런 고생을 하세요?” 내가 대답하길 “제가 원하는 라디오 듣기는 음악만 듣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 드는 라디오 찾고 수리하는 등 그 모든 수고가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만년필로 글을 쓰려면 첫 번째, 좋은 종이를 찾아야 한다. 번짐이 덜하고 뒷면 배김이 없어야 한다. 표면이 거친 것보다는 매끈한 것이 좋은데 너무 매끈하면 건너뛰는 획이 생기고 잉크가 잘 마르지 않는다.

쓸 만한 종이를 찾았으면 다음은 내게 맞는 잉크를 구할 차례이다. 만년필 회사들은 보통 자기네 회사의 잉크를 추천하지만 꼭 그럴 필요는 없다. 같은 회사가 아니더라도 만년필 회사에서 나오는 잉크를 넣으면 된다. 예를 들면 파커 만년필에 몽블랑 잉크를 넣어도 된다. 다만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잘 지워지지 않는 문서보존용 잉크는 내수성(耐水性)이 강하기 때문에 세척을 좀 더 자주 해주면 된다.

잉크도 번짐이 많은 것이 있고 매끄러운 것도 있기 때문에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으려면 수고와 경험이 필요하다. 위와 같이 좋은 종이를 찾고 자기에게 맞는 잉크를 구할 수 있어 만년필 글쓰기가 재미있는 것이다.

아날로그, 자주 쓰는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을 사전에 있는 대로 ‘물질이나 시스템 등의 상태를 연속적으로 변화하는 물리량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아날로그를 이렇게 이해하기로 했다. 그것 자체만이 아닌, 그것이 만들어지는 과정 모두가 포함된 것이라고. 뷔페의 음식이 풍성한 것 같지만 덜 맛있고 키보드로 치는 글쓰기가 재미없는 것은 바로 그것만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만년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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