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인희의 손편지] 보일러 터지던 날

입력 2018-02-08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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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겨울 추위가 유난하긴 했던 모양이다. 4년 전 입주를 시작했다는 새 아파트에서도 보일러가 터졌으니 말이다.

영하 15도를 오르내리던 중 서울에 집안 혼사가 있어 시골 아파트를 며칠 비운 사이 보일러가 동파되는 사고가 발생했다. 실내 온도를 18도에 맞춰 놓았음에도 연일 이어지는 강추위엔 어쩔 도리가 없었던 모양이다.

보일러 수리 기사에게 연락을 하니 하루에 열 집씩 방문하느라 도저히 시간이 안 난다는 답이 돌아왔다. “내일 오후에 시간 내 볼게요.” 툴툴대는 수리 기사 말만 믿고 그날 밤은 꼼짝없이 냉방에서 잠을 청했다.

바닥에 두꺼운 요 두 장을 깔고 이불을 석 장이나 덮으니 그런대로 참을 만했는데, 웬걸 코끝이 시려오고 볼도 어는 통에 엎치락뒤치락하다 한숨도 못 잤다. 하기야 어린 시절엔 웃풍이 쌩쌩 부는 방에서 언니들 틈에 끼여 잠들곤 했는데…. 밤새 꽁꽁 얼어붙은 툇마루 걸레를 보며 빨래 방망이로 써도 되겠다면서 낄낄대곤 했는데…. 우리가 언제부터 웃풍 하나 없이 따끈따끈한 집에 살았다고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하는 겐지.

보일러가 꺼진 아파트 실내의 썰렁함을 달래려고 부엌 가스레인지에 큰 냄비를 올려놓고 물을 하나 가득 담아 끓이기 시작했다. 수증기 덕분에 냉기는 조금 가셨지만 이상하리만치 일이 손에 안 잡혀 서성대는데, 보일러 수리 기사는 오후가 되어도 감감 무소식이었다.

드디어 밤 8시 넘어 도착한 기사 왈, 보일러 내부의 코일이 깨져서 새것으로 갈아야 한단다. 한데 요즘은 새 보일러 구하는 것도 꽤 시간이 걸린다는 것이다.

전날 밤은 멋모르고 냉방에서 잤지만 이틀째는 도저히 자신이 없어 인근에 묵을 곳을 찾으니, 이웃 분들이 근처 온천이나 다녀오란다. 그날 밤 우리 가족이 머문 곳은 온양에서도 제법 오래된 호텔이었는데 1층에 온천탕이 있었다. 온천 물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널찍한 탕에 몸을 담그니 어린 시절 추억이 스쳐 지나간다.

예전에는 명절이 다가오면 온 가족이 함께 대중탕에 가서 목욕을 했었지…. 그때 덩치도 크고 어른스럽던 여섯 살 위 언니는 나를 번쩍 안아 머리도 감겨주고 온몸을 깨끗이 씻겨주곤 했었지….

일주일이 지나면 까치 설날이다. 목욕하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방앗간 앞을 지날 때면 흰 가래떡 뽑는 줄이 길게 이어져 있었는데 그 많던 방앗간은 다 어디로 갔을까?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가래떡을 한 가닥씩 떼어 참기름 살짝 두른 간장에 찍어 먹는 맛이 정말로 일품이었는데, 요즘은 이런 소소한 재미를 어디서 찾아야 하나 싶다. 어디 잃어버린 것이 쩔쩔 끓는 온돌방에 따끈한 가래떡뿐이랴. 이웃 간 정담(情談)도 사라진 지 오래요, 시끌벅적한 골목길도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보일러 하나 터졌을 뿐인데 이런저런 옛 생각에 젖어 그때를 그리워하는 걸 보니 진짜 한 살 더 먹는 일이 심란하긴 한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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