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이름을 줄여서 코페르니쿠스의 ‘회전’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회전’과 ‘혁명’은 영어로는 같은 단어여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는 표현은 다소 중의적(重義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회전한다고 주장했고,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미는 원 77개를 사용해 이를 구체화했다. 당연히 너무나 복잡할 수밖에. ‘회전’에 나오는 표현대로, ‘자, 이제 우주의 중심에 태양을 놓아보자’. 코페르니쿠스는 놀랍게도 원 31개면 충분함을 증명할 수 있었다.
기하학적 단순함과 우아함에 푹 빠진 그는 사망 직전의 출간으로 후세에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우주는 수학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조화로운 구조라는 신념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우주론과 차이가 없었다. 일반적인 추측과 달리 이 책은 무려 73년 동안 아무런 제재 없이 판매되고 널리 읽혔다. 천체의 운동을 다른 방식으로 가정하면 더 단순해질 수도 있다는 ‘수학적’이고 ‘철학적’인 견해였지만, 실제 우주가 그렇게 돈다는 주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를 만든 사람은 책 출간 후 21년 뒤에 출생한 갈릴레오다. 그는 인간 이성과 합리적 사유의 산물일지라도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는 ‘근대적’ 시각을 가진 첫 번째 사람이었다. 25세 때는 피사의 사탑에서 두 물체를 떨어트리는 실험을 통해 무거운 물체가 빨리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했다. ‘실제 세계에서의 검증’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철학적 관점의 도입이고, 어쩌면 과학을 철학과 종교로부터 분리하는 시작이었을지도 모를 대사건이다.
갈릴레오는 지동설도 ‘수학적 유희’로 보지 않고 천체 운동의 실체로 보았다. ‘밀물과 썰물’의 존재를 들어서 지동설이 사실임을 증명하고자 한 시도에서 조수(潮水)가 ‘달’의 운동 때문임을 간과하긴 했지만, 관찰을 통한 검증이라는 ‘근대적 사고’의 탁월함은 놀랍다.
지동설의 실재성을 논하는 갈릴레오의 ‘위험한’ 관점은 멀쩡히 잘 읽히던 코페르니쿠스의 책으로 불똥이 튀었다. 1616년 종교재판은 갈릴레오에게 지동설 철회를 명령하고 ‘회전’을 금서로 지정했다. 그는 16년 동안 이 명령을 잘 따랐고 문제는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큰 시련이 찾아온 건, 역설적으로 가까운 친구가 교황 우르바노 8세가 되면서였다. 든든한 후원자가 생기자 1632년에 ‘두 개의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를 출간했는데, 이 책이 지동설의 실재성 주장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격노한 교황청에 의해 종교재판에 회부된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는 유명한 사건이 이 재판 말미인데, 69세의 갈릴레오는 평생 가택연금과 모든 저술의 금서 처분을 받았다.
천동설도 이성적 사유의 산물임은 분명하지만, 인간 이성은 ‘현상을 통한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는 근대정신의 탄생에는 이런 비극과 우여곡절이 필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