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주의 과학에세이] 갈릴레오의 근대정신

입력 2017-11-22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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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동설을 주장한 역사상 첫 번째 책은 1543년 출간된 ‘천구(天球)의 회전에 관하여’다. 구약 시편의 ‘세계도 견고히 서서 요동치 아니하도다’ 구절을 천동설의 근거로 해석하던 로마 교황청이 절대적 권위를 갖던 시대였다. 투사 정신을 가진 과학자가 저술했을 것 같은 이 책의 저자는 가톨릭 신부 코페르니쿠스였고, 그는 책 출간 직후에 사망했다. 교황청과의 충돌을 피하고자 출간을 미룬 것이다.

이 책 이름을 줄여서 코페르니쿠스의 ‘회전’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회전’과 ‘혁명’은 영어로는 같은 단어여서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는 표현은 다소 중의적(重義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천체가 지구를 중심으로 원형으로 회전한다고 주장했고,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미는 원 77개를 사용해 이를 구체화했다. 당연히 너무나 복잡할 수밖에. ‘회전’에 나오는 표현대로, ‘자, 이제 우주의 중심에 태양을 놓아보자’. 코페르니쿠스는 놀랍게도 원 31개면 충분함을 증명할 수 있었다.

기하학적 단순함과 우아함에 푹 빠진 그는 사망 직전의 출간으로 후세에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우주는 수학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조화로운 구조라는 신념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우주론과 차이가 없었다. 일반적인 추측과 달리 이 책은 무려 73년 동안 아무런 제재 없이 판매되고 널리 읽혔다. 천체의 운동을 다른 방식으로 가정하면 더 단순해질 수도 있다는 ‘수학적’이고 ‘철학적’인 견해였지만, 실제 우주가 그렇게 돈다는 주장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문제를 만든 사람은 책 출간 후 21년 뒤에 출생한 갈릴레오다. 그는 인간 이성과 합리적 사유의 산물일지라도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검증되어야 한다는 ‘근대적’ 시각을 가진 첫 번째 사람이었다. 25세 때는 피사의 사탑에서 두 물체를 떨어트리는 실험을 통해 무거운 물체가 빨리 떨어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반박했다. ‘실제 세계에서의 검증’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철학적 관점의 도입이고, 어쩌면 과학을 철학과 종교로부터 분리하는 시작이었을지도 모를 대사건이다.

▲갈릴레오

갈릴레오는 지동설도 ‘수학적 유희’로 보지 않고 천체 운동의 실체로 보았다. ‘밀물과 썰물’의 존재를 들어서 지동설이 사실임을 증명하고자 한 시도에서 조수(潮水)가 ‘달’의 운동 때문임을 간과하긴 했지만, 관찰을 통한 검증이라는 ‘근대적 사고’의 탁월함은 놀랍다.

지동설의 실재성을 논하는 갈릴레오의 ‘위험한’ 관점은 멀쩡히 잘 읽히던 코페르니쿠스의 책으로 불똥이 튀었다. 1616년 종교재판은 갈릴레오에게 지동설 철회를 명령하고 ‘회전’을 금서로 지정했다. 그는 16년 동안 이 명령을 잘 따랐고 문제는 사라진 것으로 보였다.

큰 시련이 찾아온 건, 역설적으로 가까운 친구가 교황 우르바노 8세가 되면서였다. 든든한 후원자가 생기자 1632년에 ‘두 개의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를 출간했는데, 이 책이 지동설의 실재성 주장으로 받아들여지면서 격노한 교황청에 의해 종교재판에 회부된 것이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는 유명한 사건이 이 재판 말미인데, 69세의 갈릴레오는 평생 가택연금과 모든 저술의 금서 처분을 받았다.

천동설도 이성적 사유의 산물임은 분명하지만, 인간 이성은 ‘현상을 통한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는 근대정신의 탄생에는 이런 비극과 우여곡절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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