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237. 우열녀(禹烈女)

입력 2017-11-17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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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개와 용기를 겸비한 하층민 열녀

우열녀의 이름은 말질진(末叱眞)이다. 1657년(효종 8) 경상도 의성현(義城縣) 동촌(東村) 점지동(店池洞)이라는 궁벽한 시골마을에서 목수의 딸로 태어났다. 21세 때 안동인 김덕립(金德立)과 혼인하였다. 시부모로부터 “우리 현부(賢婦)”라는 칭찬을 받으며 딸 하나를 낳고 행복하게 살았다.

그런데 1683년(숙종 9) 어느 날 갑자기 침입한 도적의 칼에 남편이 찔리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때 우열녀는 맨몸으로 칼을 무릅쓰고 남편을 구하고자 했으나 같이 중상을 입었다. 그 후 남편이 죽자 밤낮으로 호곡하며 굶어서 따라 죽고자 했으나 가족들의 만류로 그러지 못하고 수절(守節)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시어머니와 이별하고, 어린 딸을 데리고 친가로 돌아왔다. 친정에서는 품팔이 생활을 하며 늙고 병환 중인 아버지 막복(莫卜)을 봉양하였다.

우열녀는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서도 노부(老父)와 계모를 잘 봉양한 효녀였다. 뿐만 아니라 시어머니와 떨어져 지내면서도 인편이 있으면 반드시 안부를 물었고, 문안할 때는 반드시 음식을 보내드렸다. 남편과 시아버지에 대한 제사도 정성껏 지낸 효부였다.

그러던 중 홀아비 군인 이영발(李永發)이 오랫동안 짝사랑을 하여 청혼하였다. 이웃 부인도 개가(改嫁)를 권유했으나 우열녀는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것은 예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부부는 한 번 같이하면 종신토록 고치지 않는 것입니다”라며 죽어도 개가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개가가 문제되지 않는 하층민 신분임에도 투철했던 우열녀의 수절 의지는 17세기 후반에 이미 양반층 여성의 열(烈)의 윤리가 서민층 여성에게까지 보급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영발은 승낙을 받지 못하자 가족과 친족, 이웃까지 협박하였다. 아버지 막복과 이웃사람들은 곤경에 처하였다. 결국 우열녀는 청혼을 승낙하고 영발의 집으로 갔다. 그러나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추상 같은 꾸짖음에 이어 영발이 차고 있던 칼로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소생하였다. 우열녀는 비록 자결에 실패하였지만 죽음으로 강하게 저항함으로써 그 열행(烈行)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694년(숙종 20)에 ‘우열녀전(禹烈女傳)’을 지은 신덕함(申德涵·1656~1730)은 우열녀의 행실이 완비되었다고 크게 칭찬하였다. 우열녀가 궁벽한 시골마을에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견문도 없이 절개, 효, 지혜, 용기를 겸비한 행실은 옛 열녀보다 뛰어났다는 평가를 내렸다. ‘우열녀전’에는 출생과 성장 배경, 결혼 초의 시집 생활, 도적의 침입으로 남편이 죽고 졸지에 과부가 된 과정, 군인 이영발의 청혼과 협박, 결혼 독촉과 거짓말, 이웃부인의 개가 권유와 이에 대한 저항과 수절 의지, 이영발의 집 마당에서의 자결 시도와 소생 등이 매우 생생하게 서술되어 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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