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외교안보 정책을 두고 여·야의 공방이 치열하다. “국가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라는 말이 자주 나오고, “이래 가지고서 어떻게 국가의 안위를 책임질 수 있겠느냐”는 질타도 쏟아지고 있다. 다 잘못하고 있는 말들이다.
‘안위’는 ‘安危’라고 쓰고 ‘안전할 안’, ‘위태로울 위’라고 훈독하며 ‘안전과 위태로움’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안위를 지킨다거나 책임진다는 말은 국가의 ‘안전과 위태로움’을 다 지키고 책임진다는 뜻이 되고 만다. 말이 안 된다.
안전이나 안보는 책임지고 지켜야 할 대상이지만, 위태로움은 책임지고 지켜야 할 대상이 아닌데 안전과 위태로움 둘 다 책임지고 지켜야 한다고 하니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혹자는 ‘위로할 위(慰)’를 써서 ‘安慰’라는 뜻으로 말한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한다.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安慰’는 어떤 일을 당하여 몸과 마음이 다 피폐해진 사람을 위로할 때 사용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의 사상가인 한비자(韓非子)는 “안위재시비, 부재어강약(安危在是非, 不在於强弱)”이라고 했다. ‘시비(是非: 옳을 시, 아닐 비)’는 ‘옳고 그름’이라는 뜻이다. ‘강약(强弱: 강할 강, 약할 약)’은 문자 그대로 ‘강하고 약함’이라는 뜻이다. ‘在’는 ‘있을 재’인데 여기서는 “-에 달려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한 나라의 안전과 위태로움은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리는 데에 달려 있지, 경제력이나 군사력의 강함과 약함에 달려 있지 않다”는 뜻이다.
한비자인들 어찌 경제력과 군사력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겠는가! 그러나 그는 안전과 위태로움의 관건(關鍵)이 경제력과 군사력의 강약보다는 시비를 분명히 가리는 정의로움에 있다고 본 것이다. 정의롭지 않은 안전과 평화는 끝까지 이어지지 않는다. 눈앞의 경제적 이익에 급급하여 일본이나 중국의 정의롭지 못한 역사 왜곡을 방치할 때 우리는 또다시 국난을 당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