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오빠 사도세자 죽음에 관여한 정조의 고모
화완옹주(和緩翁主·1738~1808)는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의 막내딸로, 영조의 9녀이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친여동생으로 정조의 친고모가 된다. 12세 때 동갑인 일성위(日城尉) 정치달(鄭致達)과 혼인하여 슬하에 1녀를 두었다. 그러나 딸이 태어난 지 5개월여 만에 죽고, 딸이 죽은 지 한 달도 못 되어 남편 정치달이 20세에 요절했다.
화완옹주는 옹주 시절 아버지 영조의 총애를 무척 많이 받았으며, 그에 따라 궁중에서 실세가 되었다. 그에 따라 부마 정치달뿐만 아니라 양자 정후겸(鄭厚謙·1749~1776)도 영조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영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주 화완옹주의 살림집에 거동하였다. 정치달이 죽은 같은 날 조금 뒤에 중전 정성왕후 서씨가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위의 집으로 문상을 갔다. 그만큼 영조는 화완옹주와 부마 정치달을 사랑했던 것이다.
이후 영조는 딸과 남편을 일찍 잃은 청상과부 화완옹주를 배려하여 궁궐로 들어와 살게 했다. 이러한 영조의 총애는 화완옹주를 궁중에서 실세가 되게 하였다. 그리고 양자로 정후겸을 정해주었다. 정후겸은 인천에서 생선 장수로 가난하게 살던 정석달(鄭錫達)의 둘째 아들로 당시 16세였다. 그는 대과에 합격하자마자 영조의 사랑과 배려 덕분으로 빠른 속도로 출세하여 당대의 실권자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그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연루되어 홍인한(洪麟漢) 등과 함께 후일 정조가 되는 왕세손의 대리청정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리고 세손을 모해(謀害)하였다. 화완옹주도 아들 정후겸을 도와 홍인한과 결탁하여 정조를 핍박하였다. 따라서 정조의 즉위는 화완옹주의 정치적 위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정후겸은 정조가 즉위하자 역적이 되어 28세의 나이에 함경도 경원부에 유배 보내졌다가 사사되었다. 그리고 화완옹주를 사형시키라는 대신들과 삼사(三司)의 탄핵이 줄기차게 계속되었다. 화완옹주는 종사(宗社)에 관한 죄를 지은 역적 죄인으로 취급되어 1778년(정조 2)에 강화도 교동부에 귀양을 가게 되었다. 또한 더 이상 옹주로 간주되지 않고, 정치달의 처라는 뜻의 ‘정처(鄭妻)’로 낮춰 불렸다.
4년 후인 1782년(정조 6)에는 정조가 몰래 선전관을 시켜 화완옹주를 강화도 교동 섬에서 육지 파주로 옮겼다. 파주에는 남편 정치달의 묘가 있었다. 이를 안 삼사와 대신들은 또다시 화완옹주에게 사약을 내릴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조는 선왕 영조가 사랑했던 사람이며 선왕의 성덕(聖德)에 누가 될까 염려하여 끝내 사약을 내리지 않았다.
마침내 1799년(정조 23) 3월 4일 62세가 된 화완옹주를 용서하라는 하교를 내렸다. 그 후 화완옹주는 서울 도성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며, 1808년(순조 8) 5월 17일 71세에 생을 마쳤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