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원의 세상풍경] 백로, 포도순절에

입력 2017-09-08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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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백로(白露)였다. 이맘때는 낮 더위도 완전히 가시고, 밤이 되면 기온이 크게 떨어져 공기중에 있던 수증기가 엉겨 풀잎에 이슬이 맺힌다. 그래서 흰 이슬 맺히는 절기라는 뜻으로 백로라고 부른다. 앞선 절기 처서(處暑)가 여름이 물러간다는 뜻이라면 백로는 말 그대로 가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가을은 낮엔 따뜻한 햇살과 함께 오지만, 밤엔 이슬과 함께 온다.

어릴 때 산골마을에서 시내 중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이 무렵 가을이 참 싫었다. 집에서 버스가 오가는 신작로까지 나가려면 15분쯤 산길을 걸어야 하는데, 이 산속의 오솔길이 아침마다 이슬밭 길이었기 때문이다. 신작로까지 나가면 풀숲의 이슬에 비가 오는 날이든 맑은 날이든 바짓가랑이가 다 젖고 신발까지 흠뻑 젖어 걸을 때마다 신발 속에서 질컥질컥 땟국물이 올라오곤 했다. 그래서 그 핑계를 대고 학교 가기 싫다고 하면 어머니가 아침에 그 오솔길의 이슬을 털어주었다.

아침마다 마주치는 이슬 말고는 모든 것이 풍족한 계절이었다. 처서엔 여름이 지나가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도 백로엔 산마다 들마다 가을이 익는 소리가 들린다. 산 가득 개암이 익고, 앞산 뒷산의 도토리 아람이 떨어진다. 산마다 도토리 열매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곧 밤이 익고 다래 넝쿨의 넓적한 잎 뒤에 숨어 다래가 익는다.

산에서 가을이 익어갈 때 들판의 가을은 더 요란하게 익어간다. 배, 사과와 같은 과일은 가을 볕에 더욱 노랗게 더욱 빨갛게 익어간다. 오미자도 붉은 빛을 더한다. 나무 과일만이 아니다. 옥수수가 익어 베어야 하고, 들깨와 참깨가 익어간다. 고추는 사나흘마다 한 번씩 따서 햇살 좋은 마당과 지붕에 얹어 말린다.

가을의 제철 과일로 포도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이야 여름부터 시장에 포도가 나오지만, 예전에 포도는 백로의 대표 과일이었다. 까맣게 익는 먹포도도 그렇고 이육사의 시에 나오는 청포도도 그렇다. 시 ‘청포도’에 나오는 ‘내 고장 칠월’은 음력 칠월이다. 백로부터 추석 때까지를 포도순절(葡萄旬節)이라고 불렀다. 옛날 어른들은 이 무렵 보내는 안부편지에 꼭 포도순절이라는 말을 넣었다.

지금은 초가집이 없어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지만, 내가 어릴 때는 밤에 초가지붕 위를 보면 또 하나의 달처럼 둥그렇게 박이 열려 있었다. ‘흥부와 놀부’ 이야기 중에 박 이야기가 나오는 것도 백로가 되면 제비가 떠날 준비를 하기 때문이다. 기러기와 제비가 서로 임무 교대를 하는데 옛사람들은 한 닷새쯤 먼저 기러기가 보이고, 그다음 제비가 강남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농사는 일 년 365일 다 바쁘다 해도 그래도 드문드문 한가한 때가 있다. 그게 봄에는 모심기를 막 끝냈을 때이고 가을에는 백로의 첫 이슬이 내린 다음 들판의 곡식들이 익어갈 때이다. 추석이 오기 전 산골 아낙네들이 일 년에 한 번 친정 나들이를 하는 것도 이맘때다. 봄은 춘궁기라 어렵고, 여름은 일손이 바빠 엄두를 못 낼 뿐만 아니라 어떻게 짬을 내더라도 친정에 들고 갈 마땅한 것이 없었다. 그러다 백로가 되면 함지 가득 친정에 이고 갈 과일을 담을 수 있었다. 친정에 갔다가 다시 집으로 올 때도 풍족했다. 무언가 서로 조금 넉넉해지는 시기가 바로 밤에 이슬이 맺히는 백로 무렵이다.

올해는 윤달이 들어 추석도 늦지만 몇 년 전 어느 해는 백로에 추석이 들기도 했다. 이슬과 함께 가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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