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치 및 언론문화의 가치체계 전환은 불가능 한가 =
정권교체이후 언론인의 성향분석을 하려 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필자가 '정치저널'과 관계를 시작한지 어언 30여년_. 새 정권이 다시 들어서고 있고, 정권이 바뀔때 마다 그러했듯 또다시 '언론탄압론'설이 나돌게 하고, 새 정권 일각에서 뭔가 지나친 과욕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없질않다. 이른바 '10년 좌파정권의 종식'에 따른 '한국정치의 환골탈태'를 주장, '강한 드라이브'가 예견되기도 하고, 또다른 일각에선 이른바 진보진영 보다도 의욕적인 '새 정권의 개혁안'들이 결국엔 중도좌초할 수 밖에 없을 것이란 전망들 까지도 뒷따르고 있다. 그동안 현대사에서 우리의 '정치문화'가 간단없이 그러해 왔기 때문이다.
집권당 내부의 '권력각축'이 일어날 조짐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인 것 같고, 정치인 개개인의 이해관계에 따라 유리하게 당면한 '정치사안'들을 해석, 행동에 옮기려는 경향도 사라지지 않는 모습이다. 이명박의원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까지도 이런 시각차는 일부 계속됐다. 강도는 다소 약화됐지만 현실사안을 자파 중심적으로 편의화시켜 해석하려는 경향은 이번에도 없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정치의 근복적인 '속성(俗性)'이란 생각이 들었다. 극복돼야 할 과제였다. 이제는 정쟁의 정치에서 진정한 '민생(民生)의 정치'로 바뀌어야 한다. 모든 것에 앞서 정치인의 '의식변화'부터 긴요하지 않을까 하는 판단도 들었다. 오랜 정치부 기자생활 동안 전화도 많이 받았다. 격려도 있었고, 이해관계에 따른 주문도 있었다. 그러나 공평하게 다뤄달라는 내용이 마음이 쓰였다.
물리적 공평이 과연 진정한 공평인가. 수많은 '사실'들의 구성으로 '진실'이 형성된다지만, 사실(fact)의 취사선택에서 부터 인간의 편견은 작동을 시작한다는 것을 필자는 오래전부터 정치기사에서 주목, 항상 유념하려 했다. 중립을 표방하는 양시양비론(兩是兩非論)의 보도가 흔히 유행했지만, 여기에도 특정시각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공정보도라고 했지만 가식이 많았다. 가혹하게 말해 이 '양시양비론'의 경우 무책임한 경우도 적질 않았다.
'막스 베버'가 생각났다. 가치중립과 가치전제를 놓고 끊임없이 고뇌했던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게 까지 생각이 미쳤다. 필자의 대학 졸업논문은 '막스 베버'에 관한 것이었다. 어차피 가치중립은 없다. 사실을 중시하되, 가치전제를 분명히 해야한다. '정직'은 역시 언론에 있어서도 가장 설득력을 갖게하는 '무기'라고 믿었다. 그 가치전제가 옳았느냐에 대해서는 독자가 결국 판단할 문제다.
적어도 단발성 기사(기자사회에서는 스트레이트라고 지칭)가 아닌한, 이른바 총체적 진실을 가려보려는 해설성 또는 사설형 기사의 효과적인 전개형식은 없는 것일까. '사실보도'와 가치전제의 '정직성'을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는 언론기법은 없는가. 필자의 글은 관심있는 독자 여러분들이 흔히 느꼈듯 전혀 새로운 '논평성 해설(commentarial interpretation)' 방식'을 시도하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떠한 '사실'도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비친다. 물그릇 하나도 위에서 보면 둥글고 옆에서 보면 4각형이다. 정파의 이해가 첨예하고 복잡하게 부딪히는 상황의 정치기사는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필자가 취재현장에서 직접 경험한 지난 90년 3당통합으로 인한 '민자당 내분기사'같은 것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치열한 내분의 와중에서 신문마다, 방송마다 보는 각도가 달랐다. '가치전제'의 차이가 현격했다. 한쪽에선 민주 정통성을 가치전제로한 'YS 죽이기' 였고, 한쪽에선 '보수정권 연장'을 가치전제로한 '민정계'옹호에 무게를 싣곤 했으며, 또다른 한쪽에선 '양김 경쟁시대'를 전제, 'YS를 살리지 못한채 여권에서 구민정계 세력을 다시 대통령 후보로 내세워 DJ와 대적시킬 경우 다시 국가적으로 엄청난 대립혼란과 정상적 민주주의까지 기대할 가능성마저 없어 질 것'이라는 논조로 'YS 살리기'에 동조하는 경향도 가세됐다. 이런 사태는 큰 테두리의 가치전제가 솔직하게 먼저 선언돼야 할 성격이었음에도, 그러지 못한채 각기 편의적으로 계속 사실보도로만 일관들했기 때문에 독자들이 많이 오도되고 혼미를 겪어야만 했다.
논리전개의 성실성도 물론 긴요하다. 그러나 애매하게 '공평성'을 포장해서는 안된다. 진실에 대한 혼돈의 가능성이 그만큼 높아진다. 그러한 정치해설은 언론의 정도가 아니며, 오히려 정국의 불안만 높여줄 따름 이라고 필자는 믿고 있다. 획일적 사고가 강요되지 않는 진정한 '자유언론시대' 일수록 그만큼 '가치전제'는 책임있게 전달돼야 한다. 그런 연후에 독자와 역사는 보다 정확한 판단을 내리게 될 것이다.
정치부 기자로서 필자의 평소 가치전제는 줄곧 '문민정치'였다. '박정희 정권'이 좋은 업적도 많이 쌓아 놓았지만, 그 오랜 역기능도 박정권 말기로 부터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 국가사회에 만만치 않게 쌓여가고 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권위주의는 이제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군정문화가 종식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라고 믿었다. 취재현장 당시 김대중씨나 김영삼씨가 정권을 잡는 것은 오랜 군정문화에 뿌리를 둔 기득권 정파에 비해 그래도 상대적으로 정당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시대와 역사의 흐름에 순응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른바 당시 태동을 시작했던 '민중혁명론'이란 진보노선도 현실적으로 국가의 안전을 담보하기에는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필자의 정국인식이었다. 정치는 현실에 철저히 바탕을 두고 끊임없이 이상을 향하여 조화시켜 나가는 지혜의 과정이라는 것도 정치부기자 생활동안 터득한 나름대로의 확신이었다. 이것은 극히 평범한 상식이기도 하다고 믿었다.
이때문에 특히 양김씨, YS와 DJ 두 사람을 인위적으로 청산하려는 것, 정계 내부만의 세력투쟁으로 '제거'하는 것은 '순리'의 흐름이 아니라고 보았다. 양김구도의 역기능과 순기능을 따지기 이전에, 양김시대의 마감도 국민의 최종판정을 거쳐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들은 누가 뭐래도 질곡같은 한국 군정문화시대에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서 가장 '용기있게' 달려온 두개의 수레바퀴이자 현대사의 주역이 아니었던가.
따라서 '양김'에 대한 '청산론'은 '혁명'이거나, 아니면 '음모'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기득권 세력으로 부터 재야에 이르기까지 양김의 제거를 노리는 정파들은 많았으나, 결코 믿음직한 혁명세력은 실존하지도 않았다. 개인의 사생활이면 몰라도 국가의 장래에는 가능한 '위험요소'가 적어야 한다고도 믿었다. 이것을 혹자는 보수성향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가치전제' 분명히...국가. 민족웅비의 새 각오 다짐을
3당통합 이후 줄곧 집권당을 출입, 취재하면서 모든 취재방향과 포커스도 이런 흐름의 '가치전제'에 맞춰졌다. 때문에 나라의 혼돈을 몰고온 원천이 됐던 집권당 안의 치열한 권력투쟁 과정에서 군부출신을 축으로 한 거대세력이었던 민정.공화계의 기득권적 기반연장 노력에 '거부감'을 담을 수 밖에 없었다. 소수세력으로서 '호랑이굴'같은 살얼음의 시험대위에 올려져 있었던 김영삼정파의 전략과 전술을 예의 주시했고, 그 승리를 마음속으로 기원했었다. 또 동정했었다.
그것은 인간적으로 약한 자를 돕는 언론인 본연의 '정의감'이기도 하다고 필자는 믿었다. 더욱이 시대적 전환기에서 적어도 여당안에서 만이라도 문민세력이자 전통 야당세력이 승리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여야간의 정권경쟁과는 별개의 차원이었다. 솔직한 필자의 고백은 이런 것이었다. 그러나 마음의 뜨거움을 이성적으로 절제하며 기사만은 어디까지나 '사실(fact)'에 입각, 차갑게 써야 한다는 다짐을 하고 또 했다. 기자는 공인(公人)이라는 각오도 거듭 새롭게 했다.
그러나, 필자는 불현듯 외롭게 가고 있음을 느꼈다. 상당수 언론이 여권내 'YS 고사(枯死)'를 정당화 하거나 부추기는 방향으로 흐르는 적도 상당기간 지속됐다. 일부 현역 언론인들의 그런 정서도 수시로 표출되곤 했다. 내각제 개헌각서 파동등 권력투쟁이 정점으로 치달을 때는 그런 경향이 지나쳤다. 심지어 진보지를 자처하는 언론기관까지 민정.공화계의 편을 노골적으로 들고 있었다. 그 나름대로의 가치판단이 있었겠지만, 도대체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적어도 필자로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당내 민정.공화계의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도 많았다. 돌아보면 'YS고사'의 핵심 뇌관이었던 내각제 개헌의 추진을 언론이 앞장서 부추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 중 상당수 언론은 6공 종반부 YS가 여권의 새로운 축으로 굳어지자 다시 방향을 돌렸다. 나는 동료언론을 매도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것은 우리 언론인 모두 앞으로도 반추해야 할 일이라는 문제의식을 아직도 갖고 있다. 최소한 일관성의 결여는 반성해야 할 대목이었다. 그것은 지조의 문제이기도 했다.
이같은 시각에서 정치기사를 다루는 동안 필자의 글은 '언론사회의 제도적 틀'속에서 우여곡절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일부는 보도됐고, 일부는 발표가 보류됐다. 일부는 '타인'들의 첨삭을 거쳐 왜곡되게 나간 일도 있었다. 주변의 여건은 어려웠다. 격려도 많았지만, 필자 개인에 대한 흑색선전도 없지 않았다. 지역감정에 바탕을 둔 비난도 있었다. 혼돈의 정치계절은 이미 언론계조차 물들이고 있었다. '진실'과 '진정한 애국의 마음'은 갈등하고 압박 받았다. 강한 큼 부러진다던가.
필자는 갈대이기를 거부했다. 신상에 변화도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아직도 이같은 정치부 기자로서의 족적이, 격동의 정치사를 지켜본 한 언론인으로서, 한결같은 '신념'을 고수하려 했다고 말하고자 한다. '진실의 편'에 서기위해 적어도 고민했다고 자신하고 있다. 언론은 '진실'이다. 주변을 돌아보며 한국언론이 안고 있는 숙제라고도 생각했다. 성숙된 민주주의를 향한 영원한 도정의 길목에서 올 수 있는 혼돈의 과정쯤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제 새로운 정권이 또 나름의 가치관으로 국정을 다루기 시작했다. 그동안 대한민국의 험난한 민주도정을 거쳐 그 과정과 등장도 당당하고 정당했다. 필자의 '호소'를 다시 언론에 보낸다. 우리의 역사가 그러해왔듯 작은 길을 찾으려 하지 말고 '민족 웅비'의 큰 길로 모두가 나서자는 간절한 염원의 목소리다. 정당이든 사회든 국가든, 이제 내분은 끝나야 한다. 각자의 인격과 호흡을 가다듬고 새로운 시대의 성격과 흐름에 맞춰 함께, 더불어 살기위해 다시한번 노력해 보자는 작은 웅변이다. 국가적 현안이 되고 있는 '양극화 현상'의 해소에 더 많은 지혜와 노력을 경주해야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다할 것이다. 그동안 한국정치의 왜곡과정에서 뿌려지고 남겨진 불신의 찌거기들을 함께, 스스로 거두어야 한다. 상처들을 서로 어루만지며 가치체계의 혁명을 이뤄보자는 하나의 주장이다. 신뢰는 사회의 건강회복을 알리는 첫 단계일 것이다.
정치권과 정치보도를 향한 필자의 이 작은 평론도 이같은 화해의 시대정신에 바치는 도구이기를 기대한다. 초석이기를 감히 제언한다. 갈등과 분열의 계절은 일단 지나간듯 하나, 우리는 '어제'를 잊어서는 안된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정치, 경제, 사회등 모든 분야에서 갈 길은 너무도 바쁘고 무거울 지 모른다. 언론도 분명히 대전환의 시대, 선진화의 분수령으로 들어서고 있다. 구각을 벗어나야 한다.
필자의 논리전개는 끝났다. 강조점을 위해 논리의 비약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훗날 역사가 평가할 일이다. 이 글의 집필행위 마저도 또다른 '가치전제'의 굴레안에 닫힐지도 모른다. 이명박정부도, 국민의 판단도, 필자의 이 조그마한 집필도 역사와, 천심이라는 민의(民心)의 엄격한 평가로 부터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두려운 마음으로 펜을 놓는다. 국가와 민족웅비의 그날을 다시한번 기원하며, 독자여러분의 애독에 참된 감사를 보낸다.
이타임즈 이병도 주간 [bdlee@etimes.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