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주의 과학에세이] 시련 속에서 피운 꽃이 지다

입력 2017-07-20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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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눈 위에 서리가 내린다[雪上加霜]’ 또는 ‘머피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일들이 일어난다. 개인적으론 2014년 8월이 그랬다. 4년마다 개최되는 세계수학자대회가 서울에서 9일간 열린 때였다.

먼저 에볼라 사태가 터졌다. 감염에 대한 국민들의 공포가 확대되자 대형 국제 행사를 취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번졌다. 서아프리카 3개국이 위험 국가였지만, 아프리카라는 거대 대륙을 한동네로 취급하는 사람들은 모든 아프리카인의 입국 금지를 주장했다. 개발도상국 수학자 수백 명이 묵을 예정이던 대학교 기숙사에서 아프리카인은 안 된다는 시위가 일어났다. 개방적이고 합리적이던 대학생들이 세계보건기구의 의학적 조언 같은 건 무시하기 시작했다. 공포감이 공황사태를 낳는 형국이었다.

그러더니 교황 방한일이 수학자대회 개막식 날인 13일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개막식 참석 예정자들의 불참으로 수학의 최고상인 필즈상을 수여하는 전통적 방식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당황하던 차에 교황 방한 일정은 연기됐지만, 에볼라 대책회의 등으로 개막식 날 새벽녘에야 개회사를 작성해 인쇄 담당자에게 보냈다. 개막 연설을 하기 위해 5000여 명의 수학자 앞에 서서 건네받은 영어 원고를 빼 들었다. 조금 읽다 보니, 뒷부분이 없다. 눈앞이 깜깜했다. 어쩌랴, 일생의 즉흥 연설을 어찌어찌 해야 했다.

일이라는 게 일단 시작만 하면 자체의 동력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다. 한시름 덜고 16일을 맞았다. 광복절 연휴를 맞아 밀린 휴가를 가는 사람들 덕에 서울이 한산하고 평화로웠다. 그런데 아침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나를 보고 인상을 쓴다. 이날 아침에 예정됐던 필즈상 수상 강연이 별안간 취소됐기 때문이다.

▲마리암 미르자카니

역사상 총 56명의 필즈상 수상자가 배출됐는데, 그중에 여성 수상자는 유일하다. 이 불세출(不世出)의 수학자 마리암 미르자카니 덕분에 외국 언론의 취재 열기도 뜨거웠다. 그런 사람을 자녀에게, 특히 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연휴에 지방에서 상경한 부모도 많았다. 그런데 사전 공지도 없이 임박해서 강연을 취소했으니 사람들이 왜 화가 안 나겠는가.

미르자카니 교수는 당시 유방암 말기였다. 학자로서의 최전성기에 일생의 시련을 만났지만,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할 거라는 예상을 깨고 서울에 온 상황이었다. 가족 보호를 위해 암 투병 보도 자제를 언론에 요청했는데 기자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줬고, 많은 참석자들이 그의 투병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해줬다. 당시 세 살이던 딸을 애틋해하는 걸 보고, 경호실의 협조를 얻어서 이례적으로 어린아이가 개막식에 참석할 수 있게도 했다.

건강에 확신이 없던 그의 요청에 따라 수상 강연을 안 하는 것으로 사전에 합의했지만, 일정표에 없으면 추측성 소문이 날 것이라서 일단 강연 공지는 했다. 당일에 그가 인천공항으로 출발한 걸 확인하고 강연 1시간 전에 취소 공지했는데, 덕분에 강연을 들으러 온 이들에게 비난 세례를 받게 된 것이다. 유구무언(有口無言)할 수밖에.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강인한 모습을 보이던 그가 며칠 전에 타계했다. 드넓은 코엑스 어느 구석에서 젊은 수학자들에게 둘러싸여 토론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모국(母國) 이란의 젊은이들에겐 영웅이었다. 이란 대통령이 히잡을 쓰지 않은 여인의 사진을 트위트한 첫 사례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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