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138. 신사임당(申師任堂)

입력 2017-06-22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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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 이이 어머니이기 이전에 산수화 잘 그린 조선의 예술가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이 살다 간 16세기는 ‘조선’적인 문화가 막 꽃핀 시대였다. 정치적으로 공론을 중시한 사림(士林)의 시대이며 문화적으로는 한글이 지식인들에게도 널리 퍼져 이황은 ‘도산십이곡’을, 이이는 ‘고산구곡가’를, 정철은 ‘관동별곡’ 등을 한글로 지었다. 이 속에서 사임당은 강릉, 봉평, 서울에 살면서 그림으로 당대 이름을 떨쳤다.

사임당은 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명화, 어머니는 용인 이씨다. 행동거지가 차분하고 성품이 강직해 스스로 규범을 정해놓고 실천했다. 어릴 때에 글을 익혀 사서삼경을 읽었으며, 일곱 살에 안견(安堅) 그림을 모방해 산수화를 그릴 만큼 일찍 그림에 소질을 보였다.

19세에 이원수(李元秀)와 혼인했다. 이원수는 욕심이 없고 호방한 성품이나 생활력이 강하지 못했다. 이이(李珥)는 아버지 이원수에 대해 “살림살이를 돌아보지 않으셨다”고 회고했다.

신명화는 사임당에 대한 사랑이 극진해 혼인 뒤에도 곁에 두고 싶어 했다. 이원수는 홀어머니를 모셨으나 장인 뜻을 따르기로 했다. 하지만 혼인한 해에 신명화가 세상을 뜨자 사임당은 친정에서 아버지 상을 마쳤다. 그 뒤 21세에 서울로 가서 시어머니에게 처음 인사를 올리고, 38세에 시어머니가 살림을 물려주자 서울로 와서 정착했다. 혼인한 지 20여 년 만이었다. 이 시대가 여성이 혼인해도 여전히 친정에서 살 수 있기에 가능했다.

사임당은 당대 그림으로 명성을 얻었다. 사임당이 한양에 살 때 관료를 지낸 이문건은 “산수화를 잘 그린 신씨”로 평가했다. 서얼로서 학문으로 일가를 이룬 어숙권도 “신씨는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 포도와 산수가 매우 뛰어나 한때 평가하는 사람들이 안견에 버금간다고 했다”고 기록했다. 오늘날 사임당 작품으로 그림 80여 점과 글씨 7점이 전한다. 모두 전칭작(傳稱作)이지만 당대인들로부터 예술가로 인정받은 사실이 예술가로서의 삶을 입증해준다.

사임당은 48세에 세상을 떴다. 당시 장남 이선은 28세이나 혼인도 못 하고 그 어떤 과거시험에도 합격하지 못한 상태였다. 사임당에게는 일곱 자녀가 있었지만 이이처럼 똑똑한 자식만 있지 않고 평범하고 성공하지 못한 자식도 있었다.

이런 사임당이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 추앙받은 계기는 율곡 학통을 계승한 송시열(宋時烈) 덕분이다. 송시열은 사임당이 그린 난초 그림의 발문에 “이 그림은 사람 손으로 그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연스러워 사람 힘을 빌려서 된 것이 아니다… 과연 율곡 선생을 낳으실 만하다”고 적었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쳐 1970년대에 ‘한국의 어머니’로 재탄생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임당은 조선사회 최초로 당대 재능으로 명성을 떨친 여성이다. 따라서 사임당에게 덧씌운 이미지를 걷어내고 진면목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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