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론] 소재부품 산업, 기본에서 길을 찾다

입력 2017-05-29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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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한 해 380억 개의 볼펜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세계 수요의 80%에 달한다. 어마어마한 숫자이다. 하지만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피식 실소가 나온다. 가장 중요한 부품인 볼펜심은 전량 일본이나 독일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난해, 중국은 볼펜심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14억 중국인들이 떠들썩하게 기뻐했고, 세계 산업계가 긴장했다. 볼펜심은 중국이 제조 강국이면서도 기초 기술이 부족한 현실을 상징하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4차 산업혁명을 앞두고 기초산업을 육성하고 있는 중국.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국제무역에서 볼펜처럼 소비자가 바로 쓸 수 있는 완제품을 교역하는 것은 ‘B2C(Business to Consumer)’라 하고, 볼펜심처럼 제품을 만들 수 있는 소재와 부품 등을 교역하는 것은 ‘B2B(Business to Business)’라고 한다. B2B 교역은 B2C처럼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가 중국산 볼펜에 일제 볼펜심이 박혀 있는 것을 모르고 사용해 온 것처럼 말이다.

우리나라 수출 산업은 소재부품의 비중이 높다. 지난해 전체 수출량의 약 50%가 소재부품 분야였고, 대중 교역의 73.9%가 소재부품 등 B2B 성격의 중간재였다. 최근 한반도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의 보복성 조치로 대중 교역이 큰 타격을 받았지만, 소재부품 분야는 나름 선전하고 있다. 한국산 반도체, 화학제품, 전자축전기 등이 독보적인 기술력으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기에 고품질의 완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는 한국산 소재부품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 모두 대기업 제품이 아닌가 하겠지만, 전체 교역량의 30% 이상을 중소·중견기업이 담당하고 있으니, 중소·중견기업의 활약이 적다고 할 순 없을 것이다.

소재부품은 모든 산업의 줄기와 뿌리에 있는 가장 기본 산업이다. 그러나 연구 개발과 제품화 과정에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기 때문에 시장으로의 진입 장벽이 여간 높은 게 아니다. 대신 일단 시장을 선점하면 오랫동안 독점적인 위치를 지킬 수 있다.

일본의 도레이는 1970년대에 탄소섬유를 개발해 2006년 미국 보잉과 17조 원대의 장기계약을 맺는 등 세계시장의 70%를 차지하고 있다. 네덜란드의 ASML은 전 세계 반도체 리소그래피 장비 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다. 액정화면에 없어서는 안 되는 편광판 보호필름의 경우 후지가 80%, 모니카 미놀타 홀딩스가 20%로 세계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기술력을 우선으로 하는 세계 소재부품 시장은 이처럼 히든챔피언이나 글로벌 전문 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전통적인 소재 강국들은 그런 기업들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들이다.

최근 산업 및 사회 구조 변혁의 기반기술인 IoT, 빅데이터, AI, 로봇 등을 바탕으로 한 4차 산업혁명이라는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인 흐름이 가속화하고 있다. 앞으로 펼쳐질 미래 세상에서는 이를 실제로 구현하는 데 필요한 첨단 신소재, 부품과 소프트웨어(SW)가 나와야 할 것이다.

산업통상자원부는 올 1월에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어갈 12대 신산업 목록을 발표했다. 그중 소재부품 분야는 첨단 신소재, AR·VR, 차세대 디스플레이, 차세대 반도체 등 4개 분야로 시스템 에너지 산업의 공통 핵심 기반이 되는 고부가 산업들이다. 이 분야의 수출은 현재 기술력이 좋은 중소·중견 기업들이 주도하고 있다. 소재부품 개발은 기업이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술 R&D, 수출 모색을 위한 해외 파트너 매칭, 신뢰성 기술 향상, 시험 평가 장비 기반 구축 등 국가의 체계적인 지원과 수요 기업들의 투자가 필요하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소재부품 산업에 대한 국민적인 인식 개선이다. 소재부품 산업은 반도체 산업처럼 각광을 받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른바 3D 업종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인력 수급과 인재 육성이 어렵다.

논어 학이(學而) 편에 ‘본립도생(本立道生) - 기본이 서면 나아갈 길이 생긴다’는 구절이 있다.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어쩐지 요즘 들어 자꾸 되뇌게 된다.

새 정부의 행보에 온 나라가 행복한 요즘이다. 그만큼 새 정부가 추진할 산업 정책, 특히 중소기업 정책에 대한 기대가 점점 커지고 있다. 새 정부와 중소기업계가 힘을 합쳐 우리나라 소재 부품 산업의 기초체력을 높이고 창의적인 생태계를 완성함으로써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맨 앞에 설 수 있는 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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