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의 햇살과 바람] 제자인가 친구인가?

입력 2017-05-12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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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은 나에게 특별한 해였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이력서를 냈다 탈락(脫落)해 우울하던 중에 평택에 있는 대학으로부터 초청을 받았다. 국문과를 새로 만들려고 하니 함께해 보자는 제안이었다. 멀기도 했고 국문과가 야간과정이었으므로 갈등을 하다가 결국 평택으로 출퇴근을 했다. 저녁 6시 어스름 지하 101호실은 우울했다. 거의 재수(再修) 삼수(三修)의 주인공들 야간 수업실이 신명 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교수 역시 우울의 극치였다.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치는 것보다 마음의 치유가 먼저라고 생각했다. 교무 담당에게 부탁해 버스를 제공받아 학생들을 태우고 아산만이며 평택 주변 여행을 했다. 김밥을 주문해 나눠 먹었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아픔도 나누었다. 그렇게 친해진 학생들은 세상이 귀찮다는 표정에서 살아보자는 열망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 그 학생들 중 여자 제자 몇 명과 서울에서 가장 분위기가 좋다는 곳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들을 특별하게 대접하고 싶은 마음이 끓어올랐다. 그중에는 25년 만에 만난 제자가 세 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군인이 되고 싶다며 몇 번 교수실을 찾아와 학점에 대해 의논했던 선이는 군인은 되지 못했지만 군인과 결혼해 지금은 미국에서 결혼정보회사를 설립해 꽤 잘나가는 기업인이다. 얼굴도 몰라보게 아름다워졌고 태도 또한 학생 시절보다 우아하게 변해 있었다.

“선생님, 전 새로 태어났어요. 저보고 어쩌면 이렇게 우아하냐고 묻는 사람이 많아요.”

정말 우아하게 말하는 선이 때문에 우리는 몇 번이나 옆 사람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크게 웃었다. 선이는 군인이 되고 싶었던 만큼 절반 이상은 남자 같은 모습이었으니까. 그 시절 선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우리는 백 번 공감하는 웃음으로 유쾌하게 웃었다. 국문과 반장이었던 연주는 입학식 때부터 활달했던 그 저력으로 서울 어느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문정이는 공무원의 아내가 되어 능숙한 주부로, 미숙이는 국어 교사로 살고 있다. 나는 밥을 먹는 동안 울컥하는 순간이 여러 번 있었는데, 특히 그들이 졸업식 후 잠시 교실에 모였을 때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자존심 상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이건 순전히 내 사랑 때문에 하는 말이다. 지방대학 졸업생이라 취직이 안 되면… 설령 구두를 닦게 되더라도 구두 주인으로부터 ‘이 세상에 이렇게 성심껏 구두 닦는 사람 처음 보았다’는 말을 듣도록 해라. 그러면 세상에 못 할 일이 없다. 그런데 그래도 내가 대학졸업자인데라는 생각으로 거만을 떨며 침을 뱉으며 불량하게 구두를 닦으면 어떻게 되겠니? 구두도 못 닦는 사람이 되지 않겠니?”

아이들은 숙연했고 우리는 서로의 사랑을 믿었다. 그러나 그때 그 101호실의 학생들은 정말 기적처럼 잘 살고 있다. 제자들과 25년 만에 만나 와인을 마시며 떠들어대면서 남편 이야기, 남자 다루는 이야기들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마흔다섯 살의 여자들. 대뜸 “선생님, 외로움은 뭘로?” 하면서 “돈 있는 남자? 힘 좋은 남자? 누가 더 좋으세요?”라고 묻는 이 첫 제자들은 과연 제자인가 친구인가?

나는 무한정 나이를 낮추고 있었던 즐거운 밤이었다. 비로소 ‘선생’을 했던 일에 대해 감사하는 밤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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