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결혼생활 속 詩 통해 자존감 지켜
김호연재(金浩然齋·1681~1722)는 여성의 자존감을 거침없이 드러낸 ‘자경편(自警篇)’이라는 글을 남긴 여성이다. 본관은 안동이며 강원도 고성 군수를 지낸 김성달과 어머니 이옥재(본관 연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4남 4녀 중 딸로서는 막내였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순절한 김상용이 고조부다.
호연재 가족들은 부모와 자녀들이 함께 시집을 엮을 만큼 문학을 대단히 사랑했다. 그래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호연재는 자유스럽고 친밀한 가정 분위기에서 자연스럽게 시를 짓고 온갖 책들을 탐독할 수 있었다.
호연재는 19세에 한 살 적은 송요화와 혼인했다. 송요화는 송준길의 증손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노론의 핵심 집안이었다. 하지만 남편이 밖으로 나돌면서 혼인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평소 지우(知友)처럼 지내는 부모님을 보고 자란 호연재에게 남편의 존재는 자존감에 큰 상처를 입혔다. 외손자 김종걸은 송요화에 대해 “젊어서 호방해서 법도를 생각하지 않으셨다. 외할머니께서 고결한 뜻을 품은 채 마음으로 숨은 근심이 있으셨다”고 회고했다.
호연재에게 혼인 생활은 “밤낮으로 근심스럽고 두려워서 하루도 편안할 수 없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호연재는 “깊은 밤 독수공방하나/마음 지키기를 항상 드높게” 하면서 부조리한 현실에 맞섰고, “부부의 은혜가 비록 중하더라도 저가 나를 저버리기를 심하게 하니 어찌 나 홀로 구구한 사정으로 옆 사람의 비웃음과 남편의 경멸을 받아야 하느냐?”고 하면서 움츠러들지 않았다.
남편이 바깥으로 나도는 사이 집안 경영은 그녀 몫이었다. 아랫사람들을 다스리면서 농사를 감독하고 조세 문제를 해결했으며 때론 형편이 좋지 않아 주변 사람들에게 쌀을 꾸기도 했다. 이런 호연재에게 술과 시는 큰 위안이었다. 그리고 혼인 후 10여 년이 지나 자아를 찾아가는 목소리를 담은 ‘자경편’을 지었다.
호연재는 이 글에서 술과 여자를 끊지 못하거나 멋대로 아내를 내치는 남편들을 질타했다. 그러면서 “남편이 비록 내치더라도 스스로 생각해 과실이 없다면 사람들이 비록 알지 못하더라도 하늘과 태양을 마주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이니, 무슨 까닭으로 깊이 걱정해 부모가 주신 몸을 상하게 하는가?” 하면서 남편에게 연연하지 말고 수신에만 힘써야 한다고 권유했다.
하지만 결국 호연재는 파리하게 마르다가 42세에 세상을 떴다. 남편은 83세까지 장수했다. 규방 여성으로 태어난 현실을 속상해하면서도 끝까지 ‘뜻[지(志)]’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스러져간 호연재. 그런 그녀에게 ‘뜻’이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아마도 남편이라 해도 침범할 수 없는 ‘자존’이 아니었을까? 호연재를 만나면서 지금 ‘나’는 자존이란 단어를 잊고 있지나 않은지 돌아보게 된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