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부녀동맹•애국부인회 참여한 여성운동가
박승호(朴承浩, 1896~?)는 도쿄 쓰다영학숙(律田英學塾)을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활약하였다. 도쿄 유학시절과 동아일보사 시절에 함께 활동한 최승만(‘신동아’ 잡지 부장, 이화여대 부총장, 인하대학장)과 결혼했다. 유학시절에는 여학생단체 발족에 참여했으며, 기자로 활동할 때는 양재봉강습회에서 재봉강습을 맡기도 했다.
해방 직후 좌우익 여성이 함께 조직했던 건국부녀동맹에 참여했으나, 찬탁과 반탁을 두고 분열하였다. 박승호와 박순천 등 우익 여성들은 1946년 4월 5일 독립촉성애국부인회를 발족시켰다. 이 단체의 회장에 박승호, 부회장에 박순천·황기성이 선출되었다.
1946년 11월 15일 대한여자국민당, 불교여성총연맹, 가톨릭여자청년연합회, 여자기독교청년회, 독립촉성애국부인회, 천도교내수회, (미군정)부녀국 등은 ‘독립 완수는 여성의 단결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여성단체총연맹을 결성하였다. 총연맹은 국가건설 과제 외에 여성의 권익 향상과 관련하여 여성의 공적 영역, 즉 국회와 행정부 진출 또한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에 힘입어 박승호는 다른 3명의 여성과 함께 1946년 12월 출범한 과도입법의원의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입법의원에서 통과한 공창 폐지령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창 단속을 담당하는 여자경찰서를 지원하고자 황신덕과 함께 여자경찰서 후원회를 조직하기도 했다(동아일보 1947.11.1.).
1948년 2월에 박승호는 박순천, 유각경, 최은희, 황신덕, 황애덕 등과 함께 독립촉성애국부인회와 서울시부인회를 통합하여 대한부인회를 발족시켰다. 한편으로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여성의 투표참여 운동과 여성후보 지원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이 선거에서 박승호는 박순천과 함께 국회의원 입후보 의사를 밝혀 용산에 출마하였으나 전국적으로 출마한 18명의 여성후보는 전원 낙선하였다.
1948년 8월 15일 제1공화국(대통령 이승만)이 출범하자 박승호는 사회부 부녀국장(이사관보급)에 임명되었다. 당시 전진한 초대 사회부 장관에게 박순천, 김활란, 유각경, 황신덕 등이 박승호가 최고 적임자라고 적극 추천했기 때문이다. 박승호 국장은 대한부인회를 전국적인 여성단체로 조직하는 데 행정적 뒷받침을 하여 1949년 5월 2일 전국에서 200여 명의 대의원이 참여한 가운데 제1차 대한부인회 전국대회를 열 수 있었다.
이 대회에서 초대 회장에 박순천, 부회장에 박승호·유각경이 각각 선출되었다. 최초의 거대한 전국적 여성조직이 탄생하였던 것이다. 사업으로 의식주 생활개선 사업, 문맹 퇴치, 사상 및 예의범절교육을 실시했다.
1949년 11월 창덕여중·고 교장으로 발령 받아 부녀국장에서 퇴임하였고, 교장 재임 중 6·25전쟁이 발발하여 납북되었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