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달자의 햇살과 바람] 베갯밑으로 오는 봄

입력 2017-02-10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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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도 지나고 한바탕 추위도 지나면서 입춘도 지나갔다. 그래도 2월은 춥다. 아직도 얼음이 두껍게 똬리를 튼 채 버티고 있고 바람은 볼을 벨 것처럼 사나우며 멀리 깊은 산속에는 밤새 함박눈이 내리고 온통 산과 나무를 하얗게 만들었다.

화면에 떠오르는 풍경만 보면 겨울은 아직 턱 버티고 선 소나무 같은 것이다. 그런데 슬슬 봄 이야기가 나온다. 불호령 같은 신의 명령에도 멈추지 않고 생명은 흐르고 봄은 겨울을 밀며 오고 있는 것이다.

박목월 선생님은 봄은 2월의 베갯밑으로 온다고 하셨다. 나는 봄을 표현하는 시에서 이만큼 적절하고 감미로운 표현을 본 적이 없다. 봄은 어떤 소리로 올까. 솰 솰 솰 아니면 솔 솔 솔 그것도 아니면 졸 졸 졸 그렇게 올까.

그것이 아무리 청각적인 소리로 온다고 해도 그 소리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베갯밑으로 오고 있는 봄을 미리 예감하는 시인의 감각이 여기에 이른 것이다.

그것은 무리가 아니다. 백화점이나 시장에서는 벌써부터 봄옷을, 봄 먹거리를 팔고 있고 2월이면 곧 개학날이 온다고 마음이 바쁜 사람들이 많다. 개학은 곧 봄인 것이다.

대학에 있을 때는 2월이면 강의 준비가 시작되고 계절은 분명히 겨울인데 봄을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2월은 계절로 예매한 계절이다.

겨울을 두 발로 딛고 이마로 봄을 맞으며 마음으로 이미 개나리꽃을 만나는 것이 봄이다. 겨울이 지나면 분명 봄이 오는 것인데 그 봄을 맞는 사람들의 계기는 다 달랐다. 어머니는 김치가 맛이 변하면 봄이 온다고 하셨고, 아버지는 새벽 공기 맛이 달라지면 봄이라고 하셨다. 언니는 밥맛을 잃으면 봄이고 남동생은 다리에 힘이 오른다고 했었다. 내 어릴 적 봄은 들판에서 어린 쑥을 만나는 것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들판에 나가 바람소리를 듣고 새싹의 움을 만나면 탄성을 지르곤 했다. 와아 봄이다!

봄을 ‘본다’의 준말이라고 누군가 말했지만 봄은 어쩌면 소리로서가 아니라 냄새도 아니라 형태에서 보았던 것 같다. 무엇의 변화를 볼 때 “아 봄이다”라고 말했었다. 나의 봄은 시각적인 것에 더 치중되어 있었다. 누군가가 말했다. 세 번째의 제비가 봄이라고… 처음 본 제비는 “아 봄인가?”이고 두 번째 제비는 “봄이 왔나 봐”이고 세 번째 제비를 보았을 때 “아 봄이다”라고 하는 것이라고.

봄도 예비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보고도 세 번째쯤에 믿는 것이니 말이지. 복수초는 이미 그 노오란 얼굴을 내밀었다. 나는 복수초를 보면 어깨가 시리다. 눈 속에서 샛노란 얼굴로 웃으며 핀 복수초는 가장 미약한 꽃이었다. 복수초는 복수처럼 자아를 탄생시킨 꽃이다. 다른 꽃들이 아직 잠들고 있을 때 온몸의 열을 가동시켜 제일 먼저 꽃대를 밀어 올려 경쟁에서 이긴 것이다. 그리고 다른 꽃들이 화려하게 피어날 때는 슬쩍 모습을 감춘다.

영하 20도의 혹한에서 스스로 온몸으로 열을 내고 있을 복수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한 여자를 보는 느낌 때문이다. 어쩌면 봄은 오는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 중이지 않을까. 그러기에 나는 생의 봄을 느끼며 생의 봄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 것이다. 불가능한 일이 생길 때 내가 나에게 “봄이야. 봄이라니까” 그렇게 속삭였던 것이다. 그런데 진정한 계절의 봄이 오고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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