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44. 선화공주

입력 2017-02-02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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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평민과 결혼한 신라 공주

선화공주는 신라 26대 왕 진평왕(재위 579∼632)의 셋째 딸이다. 선화공주의 첫째언니는 선덕여왕으로 즉위하는 덕만공주이고, 둘째언니는 김용춘과 태종무열왕으로 즉위하는 김춘추를 낳은 천명공주이다. 신라의 선화공주가 백제의 서동에게 시집을 간 일화가 ‘삼국유사’에 ‘서동요’와 함께 전해진다.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가 얼마나 아름답던지 신라를 넘어 이웃나라인 백제에까지 그 소문이 퍼졌다고 한다. 선화공주에 대한 소문을 백제의 서동이 들었는데, 그는 가난하지만 도량이 큰 인물이었다고 한다. 마를 캐다 팔아서 생계를 꾸렸으므로 ‘서동(薯童)’이라 하였다. 서동은 그가 가진 유일한 자산인 마를 아이들에게 먹이고, 마음을 샀다. 그런 다음에 그가 지은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 노래가 ‘서동요’이다.

선화공주님은

남 모르게 사귀어 두고

서동의 방을 밤에 마를 안고 간다.

아이들의 입을 빌려 저잣거리에 ‘서동요’가 널리 퍼졌고, 이로 인해 선화공주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공주가 귀양 살 곳으로 가는 도중에 우연히도 서동을 만나게 되고, 몰래 정을 통하게 되었다. 이후에야 선화공주는 서동의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속았다고 화를 내기는커녕 도리어 동요의 영험을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까지가 ‘서동요’에 얽힌 선화공주와 서동의 만남과 혼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삼국유사’에는 혼인 이후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선화공주는 서동의 인도로 백제에 도착하였다. 선화공주가 귀양을 갈 적에 어머니가 순금 한 말을 주었는데, 그것을 꺼내어 생계를 꾸리고자 하였다. 서동은 순금을 보고도 귀한 줄을 몰랐다가 선화공주로 인해 순금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서동은 자신이 마를 캐던 곳에 진흙처럼 마구 쌓여 있던 순금을 신라의 진평왕에게도 보내어 인정받았다. 나아가 인심을 얻어 왕이 되었는데, 백제 30대 왕인 무왕(武王)이 곧 서동이다. 무왕은 후에 선화공주의 청을 받아들여 용화산 밑의 큰 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세웠다고 한다.

선화공주는 서동과 혼인한 후 제일 먼저 생계를 꾸리기 위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였다. 그가 가진 재화인 순금을 이용하여 아버지인 진평왕과 화해하였고, 남편인 서동이 왕이 되는 것에 기여하였다. 또한 미륵사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선화공주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우선 무왕은 진흥왕 22년인 600년에 즉위하였는데, 602년부터 신라와 약 13회의 전쟁을 치를 정도로 관계가 좋지 못한 상황이었다. 또한 2009년 1월에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에서 발굴된 ‘금제사리봉안기(金製舍利奉安記)’에 의하면 미륵사를 창건한 주체는 백제 귀족인 사택적덕의 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 입으로 전해지다가 채록되어 기록으로 남은 향가인 ‘서동요’는 선화공주의 이름을 분명하게 전하고 있다. 선화공주의 삶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기억하고, 전함으로써 보존한 것이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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