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31. 헌애왕태후(獻哀王太后)

입력 2017-01-12 1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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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녀로 낙인 찍힌 고려 최고의 여성 정치가

헌애왕태후 황보씨(964~1029)는 경종의 제3비이다. 왕이 죽은 뒤 천추전에 거처했다고 하여, 흔히 천추태후(千秋太后)라고 불린다. 아버지는 태조의 아들인 대종(戴宗), 어머니도 역시 태조의 딸인 선의왕후이다. 동성혼을 피하기 위해 할머니 신정왕태후의 성씨인 황보씨를 칭하였다.

980년 경종의 유일한 아들을 낳았으나, 몇 개월 뒤 남편인 경종이 죽어 18세에 과부가 되었다. 돌도 안 된 아기가 왕위에 오를 수 없어 그녀의 친오빠인 왕치(王治·성종)가 즉위하였다. 성종은 태후를 경계해 궁 밖에서 거주하게 하고, 아들을 빼앗아 자신이 궁에서 키웠다. 또한 태후의 외척인 김치양을 그녀와 ‘추문이 있다’는 명목으로 유배를 보냈다. 태후는 인고의 나날을 보내며 조용히 자신의 편을 만들어나갔다.

당시 조정은 호족 세력과 유학자 세력으로 크게 나눌 수 있었다. 성종은 재위 기간 내내 유학을 기본 이념으로 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제반 제도를 정비해 나갔다. 특히 최승로가 문하수시중이 되면서 연등회와 팔관회를 폐지하는 등 유교적 의례를 강화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거란과 여진이 강성해지면서 송의 세력이 약화되었다. 이에 중국을 모델로 삼아 정국을 운영하던 유학자군의 입지는 좁아지게 되었다.

990년 태후의 아들은 마침내 개령군(開寧君·목종)에 책봉되고 정사를 돕게 되었으며, 997년 성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계승하였다.

즉위 시 목종의 나이 이미 18세로 성인이었으나, 태후는 섭정했다. 그녀는 우선 불교와 토속신앙을 중시해 연등회와 팔관회를 부활시켰다. 또 과거를 성종보다도 자주 시행해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고, 관부와 관직을 증설해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 송과 거란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펴는 한편, 군사제도를 정비하고 성을 쌓아 침략에 대비했다. 즉 그녀는 고려 초창기에 성종의 뒤를 이어 제반 정치제도를 정비하며 국가를 발전시켜 나갔다.

1003년 태후와 김치양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목종은 즉위한 지 6년이나 지났지만 자식이 없었고, 심지어 남색을 즐겼다는 기록조차 보인다. 태후는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로 후사를 삼고자 왕위 계승 1순위자인 조카 대량원군을 승려로 만들고, 그를 여러 차례 죽이려 하였다. 1009년 쿠데타가 일어나 목종은 살해되고, 대량원군이 현종으로 즉위했다. 태후는 고향인 황주로 내려가 20년을 더 살다가 1029년 세상을 떠났다.

태후에 대한 그간의 평가는 몹시 부정적이었다. 친척인 김치양과 관계했으며, 그 소생자로 왕의 후계자를 삼으려 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의 정절 의식은 후대와 달리 남편의 생전에 한한다. 또 가계계승 의식도 어머니의 성을 취할 만큼 양계적(兩系的)이었다. 그녀는 유교적 관점에서는 ‘음녀’ ‘악녀’로 낙인 찍혔지만, 고려시대 최고의 여성 정치가였다고 하겠다.

공동기획: 이투데이, (사)역사 여성 미래, 여성사박물관건립추진협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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