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고르는 아이 역시 한 번 고르면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최선을 다해 자기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게 된다. 서로 만족할 수밖에 없고, 만족해야 할 수밖에 없다. 케이크에 얹힌 딸기가 하나여도 아이들은 나눠 먹을 줄 안다. 딸기를 가져가는 만큼 케이크가 작아지는 것을 감수한다.
결과는 평화롭지만 과정은 치열하다. 나이프를 잡은 아이는 최대한 균등하게 자르려고 팔이 떨리도록 긴장하고, 고르는 아이는 어느 쪽이 더 크게 잘리는지 눈빛을 반짝이며 자르는 아이의 손과 나이프, 잘려 나가는 케이크를 숨죽이며 지켜본다.
아이들은 이런 원칙으로 장난감, 재미있는 책을 누가 먼저 가지고 놀고 누가 먼저 읽을지도 정한다. ‘자르는 것’이 ‘고르는 것’보다 어려울 테니 더 좋은 것, 더 큰 것을 갖게 해야 한다고? 그건 제3자의 가치판단이다. 자르는 행위가 힘은 들지만 그 자체가 즐거움일 수도 있다. 누가 자르고, 누가 고르는지는 가위바위보로 정한다.
이처럼 아이들도 아는, ‘나는 자르고, 너는 고른다-I cut, you choose’의 규칙은 ‘자르는 자’가 ‘고르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됨을 알려준다. 공정하고 공평한 사회에 꼭 필요한 원칙이다. 사회가 혼탁하고, 불평과 불만이 날로 치솟는 것은 자르는 자가 고르는 권리까지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장, 최순실 사건이 그렇지 않은가? 정치인들의 부패와 공직자들의 비리가 그렇지 않은가? 모든 갑을 관계의 부조리 또한 그렇지 않은가?
한쪽 손으로는 자르고, 한쪽 손으로는 골라 입속으로 족족 처넣으니 그들의 ‘가족’, 그들의 패거리가 되지 않는 한 돌아오는 것, 먹을 수 있는 케이크는 아주 작거나 부스러기일 뿐이고, 심지어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 배고픔에서 분노가 치솟고, 부당함과 불공정이 치를 떨게 하며 세상이 뒤집어지기를 기대하게 된다. 이런 분배가 계속되는 한 스스로는 멸시하고, 남은 증오하는 사람이 늘어나게 된다.
‘나는 자르고, 너는 고른다’. 이 신묘(神妙)한 원칙은 요즘 새로 생겨난 게 아니다. 케이크가 귀한 시대를 지나온 나의 세대는 햇볕 따사로운 겨울 마루 위에 수북이 쌓인 강냉이 튀긴 것을 이런 방식으로 나눠 먹었다. 하지만 이 원칙의 역사는 이보다 훨씬, 훨씬, 훨씬 오래다. 성경의 구약시대로까지 올라간다.
신의 지시로 조카 롯과 함께 가나안 땅에 들어간 아브라함은 식구와 가축이 늘어나 조카와 분가를 해야 했을 때 이 방법을 썼다. “네가 좌(左)하면, 나는 우(右)하고, 네가 우(右)하면 나는 좌(左)하리라-네가 왼쪽 땅을 고르면 나는 오른쪽을 가질 것이요, 네가 오른쪽을 가지면 나는 왼쪽을 갖겠노라.”(창세기 13장)
20대 초반의 존 D. 록펠러는 동업자들과 뜻이 맞지 않자 상대방보다 더 높은 가격을 써낸 사람이 회사를 소유·경영토록 할 것을 제안하고 가장 높은 가격을 써냈다. 한때 미국 석유업계를 풍미하고, 세계 부호들 위에 군림했던 록펠러의 ‘스탠더드 오일 컴퍼니’도 이처럼 ‘나는 나누고, 너는 고른다’의 원칙에서 탄생했다. ‘현찰이냐, 회사냐’에서 록펠러는 현찰을 포기하고 회사를 고른 것이다.
유방(劉邦)의 참모로, 한(漢)나라의 창업공신이 된 뛰어난 행정가 진평(陳平)은 스스로를 “나는 떡을 잘 가르려 했다”고 평했다. 후대의 제갈량(諸葛亮)이 ‘후출사표(後出師表)’에서 진평을 장자방(張子房)과 함께 높이 평가한 연유 역시 그가 이처럼 ‘공정과 공평’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이다.
1950년대에는 일군의 유럽 수학자들이 ‘공정 분배’를 모색하다가 이 ‘I cut, you choose’의 원칙에 착안하게 되었고, 20세기 후반에는 더 많은 학자들이 이론화에 참여, 세 사람 이상의 집단에도 이 원칙을 적용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간단하다. 세 사람일 경우에는 한 사람이 케이크에서 3분의 1쯤을 잘라 나머지 중 한 명이 고르게 하고, 남은 덩어리를 남은 두 명 중 한 사람이 잘라 마지막 남은 사람이 먼저 고르게 하면 된다고 한다.)
올해에도 우리 앞에는 공정히 잘라서 공평히 가져야 할 것이 많다. 대통령 선거가 그렇고, 대통령 선거 전의 정당별 대선 후보 경선이 그렇다. 개헌을 먼저 하느냐, 대선을 먼저 하느냐도 마찬가지. 하지만 참여자들은 벌써부터 가르는 권력도, 고르는 권한도 자기가 다 갖겠다고, 머리를 부딪치며 피 흘리는 것도 마다할 태세다. 경영자와 노동자의 관계, 대기업과 중소기업, 모든 갑과 모든 을의 관계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되풀이될 것이다.
어느 것에서나 공통된 것은 이미 가진 사람들이 더 많이 차지하려고 원칙과 규칙까지 독점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를 점점 더 극단으로 몰아가고 서로가 서로에게 저주와 원망을 퍼붓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도 다 알고, 연원도 그토록 오래인 ‘나는 자르고, 너는 고른다’의 원칙은 대한민국에서는 언제까지나 ‘아이들 장난’에 지나지 않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