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환 편집위원
‘의무론’의 저자 키케로(BC 106.1.3~BC 43.12.7)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사상가나 철학자 정도로 알려져 있다. 동시대의 걸출한 정치가 카이사르의 그늘에 가려진 탓인지 정치가로서의 그를 잘 아는 사람은 드물다. 하지만 그는 카이사르에 맞서 꺼져가는 공화정 체제를 지키려 한 비운의 정치가였다.
기사계급 출신이었던 키케로는 신분상의 불리함을 딛고 웅변술과 수사학을 연마해 로마 최고위 직인 집정관 자리에까지 오른다. 집정관 시절 그는 체제를 전복하려 했던 카탈리나 반란을 진압해 공화정의 수호자로서 ‘국부’라는 칭호를 얻게 된다. 하지만 뒤이어 나타난 카이사르에 의해 결국 좌절을 겪게 된다.
사실 당시 공화정 체제는 수많은 정복전쟁을 통해 거대한 영토를 확보한 로마의 덩치에 잘 맞지 않는 옷처럼 보였다. 이탈리아 전역의 주민들은 투표권이 있었고, 대중적인 정책으로 이들의 지지를 등에 업은 카이사르가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귀족 중심의 원로원이 지배하는 공화정 체제가 부패했다며 새로운 정치질서를 추구하고 있었다.
결국 카이사르는 재력가 크라수스, 군 장성 폼페이우스와 손잡고 원로원 세력을 무력화한다. 흔히 말하는 삼두정치의 시작이었다. 카이사르는 당시 국부로 대접받고 있던 키케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지만 키케로는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려 한다며 끝끝내 거절한다.
크라수스가 전사하고, 폼페이우스마저 제거한 카이사르는 종신 독재관 자리에 올라 사실상 1인 독재시대를 연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그가 방심한 탓일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귀족세력의 함정에 빠져 살해당한다. 카이사르 암살로 키케로는 로마 공화정을 기사회생시킬 절호의 기회를 잡았으나 카이사르의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의 배신으로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