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대 국문과 교수
올해의 대표적 이슈 메이커는 트럼프와 알파고였다. 트럼프는 정제되지 않은 언어 표현에도 불구하고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와 백인 인종주의 강화를 정책적 지향으로 제시하면서 차기 대통령 자리를 거머쥐었다. 실제 득표에서는 힐러리 클린턴에 밀렸지만 연방국가 특유의 선거제도 덕분에 근소한 차이의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인공지능 알파고는 이세돌 9단과의 바둑 대국에서 승리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인간의 위대함을,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왜소함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지난 3월 9일부터 15일까지 총 5회에 걸쳐 서울의 한 호텔에서 진행된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결은, 최고 실력자와 최고 인공지능 프로그램의 대결로 주목을 받았고, 결과는 알파고의 4대 1 승이었다. 어쨌든 세계는 급변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대한민국에서 2016년은 어떤 해로 기억될까? 근대사에서 우리는 특정 연도를 특정 사건과 연결해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가령 1919년은 3·1운동, 1945년은 광복, 1950년은 6·25전쟁, 1960년은 4·19혁명, 1980년은 광주민주화운동, 1997년은 IMF, 2002년은 한일 월드컵 4강의 해로 기억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2016년은 ‘박근혜-최순실-정유라’로 연결되는 전대미문의 정치 스캔들과 광화문 촛불 그리고 대통령 탄핵소추의 해로 남을 것 같다. 그야말로 최고 권력의 무능과 부패가 하나의 고리로 악순환한 사례가 21세기 한복판에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국민들이 겪은 트라우마는 여간 깊은 것이 아닐 터이다. 어쨌든 허망하기 짝이 없었던 병신년(丙申年)은, 전혀 유쾌하지 않은 표상으로 우리 역사 속에 어둡게 기록될 것이다.
문학상 수상의 두 풍경
연말이 되면 각 언론사는 그해의 10대 뉴스를 뽑는다. 아마도 곧 그 결과가 드러날 것이다. 여기서는 문학계에 한정해 5대 뉴스를 한번 선정해 보면 어떨까? 물론 그것들이 다른 것보다 훨씬 배타적 중요성을 띠는 것은 아니고, 다만 우리의 일상에 작은 파문과 균열을 일으킨 사건들을 기억하자는 뜻이다.
올해를 뜨겁게 달군 뉴스는 지난 5월 들려왔던 한강의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 소식일 것이다. 작년의 표절 논쟁 맥락을 탈출해 한국 소설의 화려한 귀환을 알리는 낭보(朗報)였다. 한국 작가가 세계적 명성의 문학상을 받은 것이 거의 처음이고, 더구나 수상작에 대한 격찬이 이어지면서 한국 소설은 세계 문학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는 중평이 뒤따랐다. 수상작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영국의 데보라 스미스 역시 공동 수상하면서 인지도를 크게 올렸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 모르는 게 있다. 수상 소식이 들려오던 날 작가는 런던에 있었고, 수상 결정이 나자 바로 시상식이 열렸다. 그렇다면 작가는 자신의 수상 사실을 미리 알았을까? 그게 아니다. 맨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은, 알다시피 비영어권 작품을 영어로 번역한 작품에 주어진다. 그러니 원작자와 번역자가 동일한 상금을 받을 정도로 ‘영어 번역’이 중요하다. 그만큼 ‘영어’의 권위가 절대적인 것이다.
더구나 맨부커상은 시상식에 후보로 올라온 작가와 번역가를 모두 불러서 수상자를 발표하고 다른 후보자는 박수를 치게 하는, 요즘 예로 들면 방송대상 시상식 같은 포맷을 취한다. 노벨문학상은 물론,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문학상도 미리 수상자를 발표하고 따로 시상식을 하는 게 상례인데, 왜 맨부커상은 상을 받지도 못할 후보자들을 굳이 런던으로 오게 하는 것일까? 이를 두고 그레이트브리튼의 제국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하는 의견이 있다. 어쨌든 유별난 시상식임에는 틀림없다.
올해의 두 번째 뉴스는 미국 가수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것이다. 전통적으로 시인이나 소설가에게 주로 주어졌던 노벨문학상이 전혀 차원이 다른 ‘대중음악가’에게 주어진 것이다. 지난 10월 13일 스웨덴 한림원은 밥 딜런을 수상자로 선정하면서, 밥 딜런이 밀턴과 블레이크까지 소급해 올라가는 위대한 영국 전통 속의 시인이라고 평가하였다.
어쨌든 이 결과는 우리나라에도 여러 질문을 파생하기 시작했다. 노래 가사가 문학일 수 있는가? 음악과 문학의 경계선은 어디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여러 갈래로 제출되었는데, 가장 먼저 대두된 의견은 음악가인 밥 딜런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었다. 자격과 수준 문제라기보다는 범주 착오라는 견해가 다수였다. 그런가 하면 밥 딜런의 수상 결정이 문학의 경계를 넓혔으며 순문학 지상주의에 대한 일대 경종이라고 반기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시의 음악성 회복에 대한 주문이라는 해석도 있었고, 최근 세계 문학계에 던지는 조롱 섞인 비판이라는 의견도 있었다. 아무튼 올해 노벨문학상은 두고두고 파격의 범례로 남을 것이다.
아주 우울한 뉴스들
세 번째 뉴스는 한없이 우울한 것인데, 문인들의 성희롱이나 성폭력에 대한 고발과 폭로가 잇따랐다는 것이다. 올해 문단 전체를 담론적으로 뒤흔든 것은 ‘여혐’으로 통칭되는 언어 표현과 문인들이 실제 연루된 성추문 사태였다고 할 수 있다. SNS를 통해 과감하고도 신속하게 제보된 여러 성추문 사건들은 대부분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의 사과문 게시로 이어졌다. 더구나 해시 태그를 통해 피해자들이 연대하는 모습은 이 문제가 여성 단독으로 제기하고 풀어가기에는 여전히 난제(難題)임을 알려준다.
오프라인으로까지 확산된 성추문 사례 고발은 그동안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넘어갔던 우리 문단의 좋지 못한 기류에 대해 커다란 문제 제기와 함께 해결의 장(場)을 동시에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작가회의 등 문학 단체는 징계위원회를 구성하여 사건을 조사하고 가해자로 판별이 날 경우 징계를 계획하고 있다. 5월에 일어난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을 필두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혐의 이면이 폭력적으로 드러난 올해에, 다시 한번 ‘문인’의 윤리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네 번째는 블랙리스트 파문이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있는 문화예술인들은 1만 명 가까운 숫자였다. 세월호 참사 관련 시국선언을 했거나 2012년 대선, 2014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야당 후보를 지지한 이들이 대부분이다. 문화예술인도 자유로운 정치적 의사 표현의 주체라는 점에서 이러한 권리를 국가권력이 박탈하고 위축시키는 것에 대한 항의와 비판이 뒤따랐다. 그리고 이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가 급격하게 퇴행했음을 선명하게 알려주는 사건이 되기에 족했다. 맨부커상 수상자라고 정부가 격찬했던 한강마저 ‘소년이 온다’를 낸 순간부터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고 하지 않는가?
지형 변화의 흐름 속에서
마지막 다섯 번째 뉴스는 매체 지형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일반인들에게는 절실하게 체감될 소식이 아니지만, 문학계 내부에서는 커다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올해 들어 우리 문예지 시장은 급변의 물줄기를 탔다. 민음사에서는 굴지의 전통과 지령(誌齡)을 가진 ‘세계의 문학’을 폐간하였고, 그 대신 전혀 다른 포맷의 ‘릿터’를 창간하였다. 소설 전문지 ‘악스트’와 함께 이 신생 잡지가 가져온 바람이 한시적 미풍은 아닌 듯하다.
그런가 하면 ‘창작과 비평’이나 ‘문학과 사회’, ‘문학동네’가 모두 편집위원 구성에서 문학 지분을 많이 덜어내고 그 대신 영화, 서평, 담론 등의 전문가를 대거 투입하였다. 문학 중심을 간신히 유지하면서 ‘문학 아닌 것’들을 향한 가없는 원심의 지향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굵직굵직한 사건의 연쇄 속에서 도서 시장에는 한 해 내내 찬바람이 불었다. 한강의 수상이 가져온 훈풍(薰風)도 희유(稀有)의 권력 부패 사건으로 묻혀버렸다. 이제 다가오는 2017년은 정유년(丁酉年) 닭띠 해다. 거대한 문학적 지형 변화의 흐름 속에서, 우리 문학계에도, 새벽닭의 우렁찬 울음처럼, 밝고 힘찬 뉴스들이 충일하기를 기원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