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인물사전] 9. 원경왕후

입력 2016-12-13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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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 옆에서 조선 건국 내조, 왕비가 된 후 좌절에 빠지다

오늘날 서울 강남구 내곡동에 자리한 헌릉. 원경왕후가 태종과 함께 묻혀 있는 곳이다. 태종의 정비 원경왕후 민씨(1365~1420)는 개경의 명문가 출신이었다. 원경왕후는 열여덟에 두 살 아래인 이방원(태종)과 혼인했다. 당시 신흥세력으로 부상하던 이성계가 선택한 집안이었으니 그 사회적 기반이 어떠했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원경왕후는 혼인 후 10여 년간 이성계가 새 왕조를 창건하는 과정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여성이었다. 원경왕후는 이 경험을 자양분 삼아 남편과 한뜻으로 태조 이후의 대권을 향해 내달렸다.

원경왕후는 목숨을 위협당하는 상황도 마다하지 않았다. 태종이 정도전을 제거할 때, 남편이 화를 당했다고 오인한 원경왕후는 함께 죽을 각오로 현장으로 향했다. 나중에 정도전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발길을 돌릴 만큼 의지가 강한 여성이었다.

태조가 왕자들이 관할하는 군사를 혁파하는 조치를 내렸을 때에도 원경왕후는 무기와 말을 몰래 준비해 두었다. 아내의 도움으로 이방원은 두 차례 왕자의 난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후일에 태종은 세종에게 “사직을 세울 때 너의 어머니 도움이 매우 컸고, 그 동생들과 함께 갑옷과 병기를 정비해 기다린 공이 그 무엇보다도 크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원경왕후의 성공과 보람은 거기까지였다. 태종이 왕이 된 뒤 원경왕후는 뼈아픈 현실에 직면했다. 그 첫 번째가 후궁이었다. 태종이 왕실 안정을 명분으로 무려 9명의 후궁을 들이자 상심이 너무나도 컸다. 가족에게 닥친 참화도 견딜 수 없는 슬픔이었다. 양녕대군의 혼사 문제를 태종 모르게 아버지와 의논한 일이 화근이었다. 남동생 4명 모두 유배지에서 죽었으며, 아버지 민제도 이 일로 몸져누웠다 세상을 떴다.

열여덟 살에 혼인해 서른여섯에 왕비가 된 원경왕후는 18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다. 남편의 성공을 본인의 성공이라 여기며 살아온 세월이었다. 원경왕후가 왕비가 된 이후의 행적을 보면 태종과 의논하지 않은 일들이 종종 있다. 그리고 이 일들이 국왕 권위에 도전한 ‘사건’으로 비화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심지어 이 일들로 왕비 자리에서 쫓겨날 위기까지 겪었다.

원경왕후는 왕비가 되면서 역설적으로 생애에서 가장 찬란한 시절을 종결지었다. 국왕과 왕비의 간극을 받아들이지 못한 결과였다. 원경왕후에게 필요한 것은 부당한 현실을 감내하는 인내심과 달라진 현실을 직시하는 냉철한 판단력이었다. ‘적응’은 ‘순응’이 아니기에 치욕이 아니다. 그래서 원경왕후의 좌절이 못내 아쉽다.

정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 조선시대 여성사 전문 연구자.

저서 ‘조선의 여성 역사가 다시 말하다’ 논문 ‘고교 한국사 교과서의 조선시대 여성사 서술과 개선방향’ ‘임진왜란기 대구 수령의 전쟁 대응과 사족의 전쟁 체험’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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