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지금] 대통령으로 좌절하기는 한·미가 동병상련

입력 2016-12-05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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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한국일보 파리특파원

‘세계는 지금’ 제하(題下)의 글을 쓰는 필자가 요즘처럼 괴롭고 곤혹스러울 때가 없다는 걸 실토합니다. 지금 우리의 관심은 단 하나. 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 광장의 촛불을 더 밝혀 박근혜 대통령을 하야 또는 퇴진시키는 것 빼고 세계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거기에 신경을 쓸 독자가 대한민국 하늘 아래 어디에 있겠습니까.

‘최순실 국정농단’ 규탄으로 날이 새고, ‘박근혜 하야·퇴진’으로 해가 저무는 지금 상황에서, 예컨대 한국을 상대로 미국과 중국이 샅바싸움을 벌여온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설치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제대로 아는 분이 계실지, 하물며 최악의 경우 일본 자위대의 한반도 입경(入境)마저 좌시해야 할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의 체결이 어느 단계 어느 수준에 와 있는지에 관심이 있는 국민이 어디 한 분이라도 계십니까.

무엇보다도 심각한 건 지금 세기적 뉴스의 한가운데 서 있는, 이제 정확히 달포 후면 제45대 미 대통령에 취임할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에 관한 우리의 무관심입니다. 그렇습니다. 지금 ‘세계는 지금’의 주인공은 당연히 트럼프입니다. 그런 트럼프를 향해 미국의 뉴욕타임스가 “광인(Bigot)”, “악마의 소산(Spawn of Satan)”, “우둔하고 천박한 면에서 국가 최악의 결함 덩어리(A dimwitted, meanspirited spawn embodying nations’s worst flaws)”라고 악담과 저주를 쏟아내는 상황을 알고 있는 분이 과연 몇 명일까요? 한·미 두 나라 모두에 일시에 불어닥친 이런 실망과 좌절 속에서 향후 한·미 관계의 개척과 타진에 부심할 한국인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세계는 지금’의 테마로 과연 무엇을 올려야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있단 말인가? 필자의 고민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왕 트럼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지난달 8일 그의 당선이 확정된 후 한 달 남짓, 제 취재망에 잡힌 미국의 현 상황을 먼저 말씀드리는 게 순서일 듯싶습니다.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은 지금 미국 시민들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에 대해 느끼는 좌절과 갈등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느끼는 우리의 그것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미국 국적을 포기, 캐나다 국적으로 바꾸려는 이민 신청자의 폭주로 캐나다 영사관의 웹사이트가 주저앉을 정도입니다.

유수한 신문의 논객들이 좌절에 빠진 미국 시민들을 달래는 상황입니다. LA타임스의 마크 보스터 논객의 칼럼 ‘이를 악물고(Gritting Our Teeth)’는 이렇게 끝납니다. “지금 이민 신청을 내봐야 기대할 거라곤 면박과 퇴짜밖에 없다. 캐나다 이민국 직원이 이상적인 국가 지도자상으로 젊디젊은 자기네 트뤼도 총리를 자랑스럽게 거론할 때 당신 같으면 뭐라 대꾸할 것인가?”

뉴욕타임스의 논객 개일 콜린스가 쓴 칼럼 ‘트럼프와 적응해 살아갈 10가지 스텝(Ten-Step Program for adjusting to President-Elect Trump)’의 첫 스텝을 읽다 보면 처연하다 못해 웃음까지 터집니다. “매일 밤 실컷 마시고 취해 버리시오! 벌써 취했다고? 그럼 됐소, 당신은 희망이 보이오!”

이런 와중에 세계의 뉴스 망에서 서울의 촛불 관련 글을 골라 읽을 수 있다는 건 행운 중의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뉴스의 세계란 그러고 보면 고맙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면서도 잔인합니다. 누구 말대로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이 오듯’, 뉴스의 세계와 생태는 지금 서울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라는 문설주를 유월(踰越)하는 법이 없이 기어코 파고들잖습니까? 최순실 사태가 그토록 심각하다는 방증도 됩니다.

아래 글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관해 이번 주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잠망경(periscope)’ 난에서 다룬 ‘한국의 파워 위기(South Korea's Power Crisis)’ 제하의 글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미국외교협회(CFR) 산하 한국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이자 한미정책프로그램 책임자로 한국통인 스캇 A. 스나이더<사진>가 쓴 매우 드라이한 기사입니다. 기사의 톤과 열기 면에서 지금의 서울 촛불 인심에서 너무 탈색(脫色)된, 한갓 뉴스의 논리로만 다뤘다는 아쉬움을 남기지만, 대신 한국인 거개가 간과하기 쉬운 사태의 전망과 정확한 진단에 관해 너무나도 체계적으로 설명한 글입니다.

필자인 스나이더는 그 체계적 접근의 한 예로, 제가 앞서 촛불에 밀려 관심의 사각(死角)지대로 밀려 있다고 말씀드린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에 관해서도 빠트리지 않고 언급할 만큼 치밀성을 보여 “한국 정부가 야당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지난 11월 23일 한·일 간에 체결했다”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 미군의 사드 한국 배치는 내년 1월 20일로 예정된 트럼프 미 대통령 취임을 기점으로 미·중 마찰의 핵심 현안이 될 것으로 예단하고 있습니다.

스나이더 연구원의 글이 돋보임은 이번 최순실 스캔들이 지닌 시대적 의미 규명과 또 하나, 이로 인한 박근혜 대통령의 사임이나 탄핵과 무관하게 한국의 국정 마비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탄력적인 전망을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순실의 국정논단 스캔들은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북한의 장거리 핵 타격 역량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한국의 불안이 커진 상황과 맞물렸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이 맞은 위기는 박 대통령의 하야 여부와 상관없이 몇 달 동안 정부를 마비시킬 수 있다.”

국정 마비의 구체적 예징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선 닥친 문제는 펼쳐지고 있는 위기의 속도다. 국민의 분노가 검찰의 수사를 앞지르고 있다는 말이다. 국민의 정서와 검찰 수사 사이의 불일치로 인해 박대통령은 권력을 유지하겠다는 강한 인센티브가 생겼다. 국민의 사임 요구에도 불구하고 권력을 고수해야 할 충분한 동기를 줬다는 말이다.”

다음과 같은 분석도 내립니다. “더구나 박 대통령의 조기퇴진 조건을 협상하거나 대가를 제시할 권한을 위임받은 개인이나 단체 대표가 없잖은가. 이럴 경우 국회의 공식 탄핵 절차는 시간이 걸릴 뿐 아니라 박 대통령에 대한 동정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야당으로선 큰 부담이다.”

스나이더는 지금 문제가 되는 개헌에 관해서도 언급, 이 개헌을 통해 국가 정치 시스템의 어떤 요소가 어떻게 수정돼야 할지에 관해서도 날카롭게 파고듭니다. “프랑스 모델과 유사한 이원집정부제가 거론되고 있지만 과연 한국에서 그런 방식이 효과적일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원집정부제로는 대통령과 총리가 권한을 나누기보다는 서로 경쟁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그보다는 임명된 총리 대신 선출된 부통령이 위기관리에 더 강한 정통성을 가질 것이다.”

그러면서 “대통령 5년 단임제는 생산성과 효율성에 제약을 준다. 그래서 일부 학자는 미국 같은 4년 중임제를 지지하고 있다”고 밝힙니다.

다음은 이 논객이 내리는 결론입니다. “최순실 스캔들은 분명 개헌의 필요성을 역설하지만 정당들은 단기적인 이득을 얻는 데 그런 노력을 이용하려 들 것이다. 개헌 논의는 따라서 현재의 정치위기와는 별도로 시간표에 따라 비정치적으로 이뤄지는 게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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