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순수한 숙맥, 역겨운 숙맥

입력 2016-11-30 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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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개그콘서트 ‘나는 킬러다’ 코너가 인기를 끈 적이 있다. 유민상을 노리는 다양한 킬러들이 등장했다. 여성 킬러 김지민은 미인계를 썼다. 하지만 매주 살인 계획에 실패해 케이크, 숯, 토마토주스 등을 얼굴에 뒤집어쓰며 웃음을 선사했다. ‘허술한’ 킬러들 덕분에 유민상은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실제 현실에서 638차례나 암살 시도를 당한 이가 있다. 쿠바 공산혁명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다. “올림픽에 ‘암살에서 살아남기’ 종목이 있다면 금메달을 땄을 것”이라고 스스로 농담을 했을 정도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쿠바혁명 직후부터 눈엣가시인 카스트로를 없애기 위해 독극물 우유, 폭탄 조개, 폭발물 담배, 고압 전기, 심지어 옛 연인까지 동원했으나 매번 실패했다.

천년만년 영생을 누릴 것만 같았던 카스트로. 하지만 그 역시 ‘세월의 벽’은 넘지 못하고 지난달 25일 혁명의 동지이자 친구인 체 게바라(1928~1967)의 곁으로 갔다. 쿠바의 독재자 바티스타 정권에 대항해 1959년 1월 혁명을 승리로 이끌었던 피델 카스트로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두 혁명가의 사랑은 어땠을까? 곱슬거리는 턱수염과 이글거리는 눈빛의 카스트로는 여성 편력이 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식적으로 두 번 결혼했고, 세 명의 여성과 아홉 명의 자식을 뒀다. 그러나 비서, 승무원, 통역사 등 더 많은 여성과 사랑에 빠졌던 것으로 전해진다.

반면 어릴 때부터 독서광이었던 체 게바라는 시(詩)에 빠져 살았다. 죽는 날까지 메고 다녔던 배낭 속 노트에는 그가 사랑했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니콜라스 기옌, 레온 펠리페의 시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뭇 여성의 사랑을 받은 그였지만 연애에 대해서는 숙맥이었다.

숙맥은 숫기가 없거나 어리바리한 사람, 혹은 세상 물정에 어두운 사람을 가리킨다. 많은 이가 ‘쑥맥’이라고 쓰고 말하는데, 숙맥이 바른말이다. 숙맥이 한자어인 줄 모르고 된소리를 쓰면서 굳어진 탓으로 보인다. 숙맥(菽麥)은 글자 그대로 콩과 보리다. 콩과 보리를 구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의 ‘숙맥불변(菽麥不辨)’이 원말로, 중국 문헌 ‘춘추좌전’ 성공(成公) 제18년조에 나온다. 어린아이도 금세 알 만한 콩과 보리를 분간하지 못하니 한마디로 바보라는 비웃음이다. 황해도 방언은 ‘숭맥’, 경북지역에선 ‘숙매기’로 통한다.

숙맥불변은 ‘魚(물고기 어)’와 ‘魯(노나라 노, 노둔할 노)’를 구별하지 못하는 ‘어로불변(魚魯不辨)’, 魯와 魚, 亥(돼지 해)와 豕(돼지 시)를 구분하지 못하는 ‘노어해시(魯魚亥豕)’, 고무래를 보고도 ‘丁(고무래 정)’자인 줄 모른다는 ‘목불식정(目不識丁)’ 등과 같은 의미로 쓰인다.

체 게바라처럼 연애에 숙맥이면 답답하긴 하나 순수해 보인다. 그런데 나랏일을 맡은 이가 숙맥이라면 문제는 매우 심각해진다. 전문성, 통찰력과 함께 덕망을 갖춘 인재를 등용해 국가를 안정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게 국가지도자의 기본 역할이기 때문이다. 옥인지 돌인지, 된장인지 똥인지 구분하기는커녕 돌밭에서, 똥밭에서 뒹굴며 국가를 위기에 빠뜨린 ‘숙맥’ 대통령 박근혜. 온갖 변명을 대며 끝까지 자리를 지키려 꼼수를 부리는 그의 모습이 역겹다 못해 불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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