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역사에 말 걸다] 왜 다시 ‘광해’인가?

입력 2016-11-18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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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작가

영화 ‘광해’는 4년 전에 개봉한 영화다. 한데 요사이 언론에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다름 아닌 최순실 게이트 때문이다. 2012년 당시 CJ E&M을 이끌었던 이미경 부회장(CJ그룹)이 한순간에 자리를 잃고 외국으로 쫓겨가듯 나간 게 바로 영화 ‘광해’ 때문이라는 의혹이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 방송사 뉴스 프로그램을 통해 박근혜 정부가 출범했던 2013년 말경 청와대 수석이 직접 CJ그룹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박근혜 대통령의 뜻”이라며 이 부회장의 퇴진을 요구했다는 녹음파일이 공개되었다. 청와대의 압력으로 영화사업을 총괄하고 있던 CJ그룹 이미경 부회장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는 게 현재까지 보도된 내용이다. 과연 ‘광해’는 어떤 영화였는지 새삼 궁금하다.

조선의 어전회의가 심각한 분위기 속에 열리고 있다. 대신 한 명이 나서서 아뢴다. “명 황제 앞으로 은자 4만5000냥 대소 합하여… 금 한 관과 족자에 은 장을 입혀… 또한, 군사 총 2만 명의 병력을 명나라에 파병토록 하겠나이다.” 광해는 힘없이 입을 연다. “경의 뜻대로 하시오.”

보다 못한 한 정승이 나서서 “너무 무리한 조공이 아니냐”고 따져 묻는다. 그러자 대신은 “대감, 이 나라가 있는 것이 누구의 덕이옵니까? 명이 있어야 조선이 있는 법”이라고 답한다. 문제를 제기한 정승은 바로 꼬리를 내린다. 계속하여 조공할 품목을 아뢰자 조용히 있던 광해가 벼락 같은 호통을 지른다. “적당히들 하시오. 적당히!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치시든지… 제발 부끄러운 줄 아시오!”

영화 ‘광해’의 한 장면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시켜 화제가 되기도 했던 장면이다. 실제로 노 전 대통령은 재임 시 군사작전 통제권 회수와 관련한 연설에서 “부끄러운 줄 알아야지”라고 일갈했다. 아마 이 장면 하나로 관객 200만 명은 더 모았지 싶은 명장면이기도 하다. 서민적이고 친화적인 정치인 노무현과 광대 하선이 분한 가짜 광해군이 묘하게 오버랩되었고 보수진영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친노 인사인 문재인 민주당 대선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한 영화라며 반발했다.

‘광해’는 CJ E&M이 투자 배급해 총 관객 수가 무려 1200만 명을 뛰어넘는 대박을 터뜨린 영화다. 한국 역대 영화 순위 8위에 랭크되었다. 2012년 유수의 시상식에서 주요 상을 휩쓸기도 했다. 필자 역시 사극 영화를 눈여겨보는 입장에서 보건대 대중성과 작품성을 가장 잘 갖춘 영화로 첫손에 꼽는다.

영화의 시작은 “광해군 8년, 역모의 기운이 흉흉하니 임금께서 은밀히 이르다. ‘닮은 자를 구하라. 해가 저물면 편전에 머물게 할 것이다’”로 첫 화면을 열고 바로 뒤이어 “‘숨겨야 할 일은 조보(朝報)에 남기지 말라.’ 광해군일기, 2월 28일”이라는 자막이 이어지며 영화는 시작한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첫 화면의 자막은 연출상 허구로 만들어낸 글이며, 두 번째는 실제 광해군일기에 적혀 있는 문장이라는 사실이다. 가짜와 팩트의 영리한 조합으로 관객의 시선을 도입부부터 확 끌어들인다.

영화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15일간 벌어진 사건을 소재로 삼았다. 정치적 반대파의 암살 위협에 시달리던 광해군(이병헌)은 도승지 허균(류승룡)이 자신과 닮은 인물인 광대 하선(이병헌, 1인2역)을 데리고 오자 그를 자신의 대역으로 앉힌다. 왕과 외모가 닮은 하선은 그때부터 광해군을 대신하여 정사에 나선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팩트와 픽션의 직조를 흥미롭게 짜내기 시작한다. 무식한 광대 하선은 점차 왕을 대신하는 역할에서 실제 왕다운 면모를 갖춰 간다. 고통받는 백성을 위한 대동법 실시라든지 명나라와 금과의 등거리 외교를 통해 나라의 평화를 지켜내는 활약을 펼치기도 한다.

가짜 광해군이 어린 시종에게 묻는다. “너는 어찌하여 이곳까지 왔느냐?” 시종은 답한다. “아버님이 산골의 농부인데 공납으로 전복을 바치라 하여 결국 큰 빚을 지게 되었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아버지는 곤장을 맞은 후유증으로 결국 돌아가셨습니다.” 그러자 가짜 광해군은 “아니 이런 개 같은…”이라며 육두문자를 내뱉는다. 흔한 사극에서 볼 수 없는, 곤룡포 입은 임금이 내뱉은 욕설은 왠지 가슴 후련해지며 왕의 권위에 대한 파괴에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한다. 광해의 인간미가 물씬 풍기는 모습이기도 했다.

1인2역의 콘셉트는 마크 트웨인의 동화 ‘왕자와 거지’나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가게무샤’(影武者)에서 차용한 아이디어다. 이병헌의 물오른 연기로 보여준 1인2역의 순발력과 자칫 가벼워지기 쉬운 허균의 역할을 무게감 있게 표현한 류성룡의 연기는 이 영화를 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게 했다.

조선의 역사에서 정식 묘호나 시호를 받지 못한 왕은 연산군과 광해군 둘뿐이다. 그러나 광해군 입장에선 상당히 억울할 수 있다. 다른 왕 못지않은 업적을 많이 남겼기 때문이다. 광해는 선조와 후궁 사이에 둘째로 태어났다. 평온한 시절 같았으면 왕위에 오르지 못했을 것이다. 왜란 때 분조(分朝)를 이끌며 종묘사직을 지켜 냈다. 선조가 갑자기 죽는 바람에, 인목왕후의 영창대군을 제치고 천신만고 끝에 조선의 19대 임금에 오른다.

실제 광해군은 서인과 남인 세력이 결탁해 권력을 옥죄어 옴에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결국 인조반정으로 권력을 내준 광해는 강화로 유배를 떠난다.

인조반정의 명분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폐모살제(廢母殺弟). 인목대비의 폐위와 배 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패륜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의 역사에서 이보다 더 처참한 통치행위는 많다. 두 번째 반정의 명분은 광해의 업적이라 일컬어지는 중립외교에 대한 비판이다. 그는 왜란 중에 직접 전장에서 지휘하면서 백성들의 숱한 고초와 아픔, 그리고 고통을 직접 목도한 왕이 아닌가?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피해는 백성들이 입는다는 걸 사무치게 체감한 왕이다.

그래서 그는 명나라와 금나라 사이에서 중립 실리외교를 펼친다. 당연히 명나라에 파병할 줄 알았던 대신들은 당황해한다. 명분과 의리를 내세우는 성리학자 입장에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광해의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생각만이 있었다. 의미 없는 전쟁에 조선군 단 한 명이라도 개죽음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광해는 말년에 몸종에게서조차 ‘영감’ 소리를 듣는 수모를 견디며 기사회생을 엿보나 결국 한 많은 세상을 떠난다. 권력의 실세인 허균의 지시대로 꼭두각시처럼 움직이는 하선을 보면 최순실과 박근혜 대통령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하선은 허균의 명령대로만 행동하지 않았다. ‘까짓것 백성을 위하고 나라를 평화롭게 하는 게 무어 그리 어렵겠느냐’는 생각으로 나라와 백성만을 보며 복잡하고 까다로운 문제도 단칼에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끝내 영화에서만 봐야 하는 것일까?

oksop@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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