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문학 산책] 재난을 맞아, 재난을 넘어

입력 2016-10-0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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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국문과 교수

재난의 상상력과 문학=최근 우리는 한반도에 지진이 일어나는 것을 경험하면서, 자연적 재난이 언젠가 우리 삶에 한 번은 찾아오지 않을까 하는 근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가 하면 사회적 재난도 뜻하지 않게 겪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그러한 재난을 극복해야 하는 순간을 여러 차례 맞아가고 있다.

사전상의 ‘재난’은 뜻하지 않게 생긴 불행한 변고나 천재지변으로 말미암아 생긴 불행한 사고를 뜻한다. 여기서 우리는 재난이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 해볼 수 없는 불가항력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그동안 한국문학은 여러 각도에서 이러한 재난의 의미를 다뤄왔다. 시 쪽에서는 대체로 재난이라는 것이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의미망을 띠었던 데 비해, 소설 쪽에서는 매우 구체적이거나 가상적인 상황을 설정해 인물들이 재난과 맞서는 과정을 형상화해왔다.

일찍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는, 절망의 재난 속에서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인간의 강인한 의지를 담은 프랑스 소설이다. 작가는 가혹한 현실 앞에서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이 부조리한 이 세상에 맞서는 인간의 진정한 저항임을 역설한다.

이 작품의 참의미는, 전염병을 퇴치하는 과정보다는, 그 과정에서 ‘페스트’로 상징되는 악(惡)에 대해 집단적으로 싸우는 인간들의 존엄과 우애에 있다. 사람들 사이의 공감과 그들이 펼치는 악에 대한 저항이야말로 카뮈가 추구했던 문학 정신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소설은 재난의 원인을 어쩔 수 없는 재해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욕망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매우 개성적이다. 그 점에서 한국문학이 보여준 재난의 상상력은 욕망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과정을 서사화한다는 점에서 재난을 사실적으로 극복해가는 소설들과 철저하게 구별된다.

시에 나타난 재난= 먼저 시 부문을 살펴보자. 잘 알려진 일제강점기의 실험적 시인 이상(李箱)의 ‘오감도’는, 도로를 질주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공포의 시대를 기록하고 있다. 질주와 공포 자체가 시대적 재난을 상징하고 있는 셈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일제강점기 전체가 우리에겐 사회적 재난이 아니었나 싶다. 최근작 가운데는 고은, 최승호, 문정희, 김이듬 등이 눈에 띈다.

고은의 ‘차령산맥’은, 진실의 힘으로 역사 속의 재난과 맞서려는 의지가 표현되어 있는데, 이때 우리가 막아야 할 재난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반복되는 폭력 같은 것이다. 최승호의 ‘마을’은 산사태로 인해 골짜기 집들이 무너지고 산불이 마을 산까지 번져오는 상황을 설정, 뜻하지 않은 재난으로 인해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마을 사람들이 고슴도치처럼 몸에 가시를 두른 채 타인과의 소통을 거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문정희의 ‘한계령을 위한 연가’는, 재난이라는 상상적 상황에서 오히려 로맨스를 꿈꾸는 시인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눈부신 고립’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고픈 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김이듬의 ‘막’은, 존재론적인 한계 속에서 화자가 사랑을 호소하고 다짐하는 목소리를 담고 있다. 마지막 행의 “너를 사랑해 이 기막힌 재난과 함께”는, 재난이라는 것이 자연재해보다는 실존적으로 주어진 고통의 몫임을 에둘러 알려준다.

이처럼 시적 상상력 속에서의 ‘재난’은, 때로는 불안과 공포로 전이되어 나타나고, 때로는 지극한 사랑의 마음을 통해 치유되어가기도 한다. 그래서 시인들은 우리 시대의 재난이라는 것이, 불가피한 실존적 고통의 진원지이기도 하고, 역설적인 사랑의 처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노래한다. 아스라한 미학적 개성들이다.

소설에 나타난 재난= 다음에는 소설로 눈길을 돌려보자. 김중혁의 ‘좀비들’과 강영숙의 ‘리나’는 도시와 재난 혹은 도시적 삶이 재난의 삶임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좀비들’은 매우 개성적인 인물들이 도미노처럼 이어지는 재난 속에서 인간의 무기력하고 슬픈 존재론적 초상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좀비들을 죽이고 기뻐하는 인간들과 그에 반대해 좀비들을 살리려 하는 인간들을 포함하여, 소설은 모든 인간의 삶이 얼마나 기괴하고 왜곡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한 욕망의 병리적 차원을 ‘좀비’라는 낯선 소재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리나’는 열여섯에 국경을 넘어 낯선 나라를 방황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국경을 넘어 탈출하는 ‘리나’들을 보면서 난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전쟁, 기근, 가난으로 인해 난민들은 목숨을 걸고 국경을 넘는다. 그리고 가장 비천한 노동으로 연명해가고, 감금되고 추방된다. 자신의 조국을 탈출하여 어쩌면 반국가적이 된 인간을 주인공 삼아 작가는, 가족이나 국가라는 개념이 재난의 진원지일 수 있다는 점을 암시해준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지금 세계가 전면적으로 맞고 있는 국가 혹은 국경을 두고 벌어지는 재난과 싸움의 기록이 된다.

편혜영의 ‘재와 빨강’은 제약회사 직원으로 인정받아 파견을 가게 된 곳에서, 아내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쫓기다가 쥐를 잡는 임시 방역원으로 일하게 되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로테스크한 상상력 속에 밀도 높은 문장을 통해 작가는 극단적 재난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존엄성을 잃어가고 나아가 극한의 외로움에 처하게 되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가상 상황에서 현대사회의 병리적 상황을 파헤친 소설이다.

정유정의 ‘28’은 ‘화양’이라는 도시에서 펼쳐지는 28일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의 욕망에 관한 극한의 드라마를 통해 작가는 무섭도록 생생한 리얼 판타지를 보여준다. 다섯 명의 주인공 사이를 치밀하게 엮어가는 작가의 솜씨는, 포르투갈의 작가 사라마구의 ‘눈먼 자들의 도시’를 연상케 하는 스케일과 속도감을 보여준다.

그 외에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지옥으로 상상하는 재난의 상상력은 하성란의 장편 ‘A’, 김숨의 장편 ‘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홍수로 도시 전체가 물에 잠기는 김애란의 단편 ‘물 속 골리앗’이나 도시 전체가 눈으로 뒤덮여 폐허가 되는 상황을 보여준 김경욱의 단편 ‘소년은 늙지 않는다’ 등도 예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성란의 ‘A’는 사이비 종교집단의 집단 자살 과정을 통해, 공장 주변 마을 사람들이 숨조차 쉴 수 없게 되는 과정을 그렸고, 김숨의 ‘철’은 한 마을에 제철소가 세워지자 주민들이 철에 대한 숭배를 표현하기 위해 틀니마저 쇠로 해 넣는 과정을 통해 그로테스크한 욕망 과잉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재난의 상상력은 자연재해보다는 욕망이 빚어낸 재난이라는 인식을 더 도드라지게 보여준다. 결국 진정한 재난은 인간 욕망의 과잉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재난과 한국문학= 최근 우리는 재난과 재앙이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자연재해로부터 인공적인 대형 사고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둘러싼 이러한 위험 요소들에 대해 한국문학은 인간이 어떻게 그것들에 대응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재난으로 인한 파국의 원인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지속적으로 수행해간다. 그래서 지금은, 전면적으로 다가오는 재난의 시대에, 한국문학이 보여주는 세계적 보편성에 주목해야 할 시점이 아닐 수 없다.

더불어 우리는 이 기막힌 재난의 시대에, 인간 욕망의 과부하가 재앙의 원천임을 자각해야 한다. ‘자발적 가난’을 통해 재난의 가능성을 덜어내고, 원전 증설이나 이른바 ‘4대강 사업’ 같은 국가권력의 질주에 대해 비판적으로 성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재난에 대응하는 실제적 매뉴얼 못지않게 인간의 마음을 다스리고 치유해가는 문학적 상상력을 더욱 풍요롭게 가꾸어가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한국문학은 세계인이 공감하는 보편적 가치들, 예컨대 인권 문제, 환경 문제, 철학적 존재론의 문제를 탐색해갈 수 있을 것이다.

며칠 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된다. 재난을 맞아, 재난을 넘어서 나아가는 한국문학이 이러한 보편적 의제를 더욱 깊이 다루어 세계인의 주목을 더 받게 되기를 소망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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