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통문’과 세계의 여성인권 선언 (하편) -프랑스·미국·러시아 여성들의 함성-
“이왕에 우리보다 먼저 문명개화한 나라들을 보면 남녀가 동등권이 있는지라. 어려서부터 각각 학교에 다니며 각항 학문을 다 배우어 이목을 넓혀 장성한 후에 사나이와 부부지의를 결하여 평생을 살더라도 그 사나이에게 일호도 압제를 받지 아니하고 후대함을 받음은 다름 아니라 그 학문과 지식이 사나이와 못지 아니한 고로 권리도 일반이니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리오.”
1898년 9월 1일 한양 북촌의 여성들이 공표한 ‘여권통문’은 9월 8일 황성신문, 그리고 9월 9일 독립신문 등에 연일 게재됨으로써 여성들의 권리를 향한 조직적인 움직임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위의 인용문은 ‘여권통문’의 후미의 한 구절이다. 여권통문의 발기인인 이소사와 김소사는 조선 여성들의 열악한 처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교육받을 권리를 요구하고 그를 위해 관립여학교 설립을 촉구하는 과정에서 ‘문명 개화한 나라들’즉, 서구의 예를 끌어온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양 북촌 여성들의 기대와 달리 기실 19세기 말에 서구의 문명 개화한 나라들에서조차 남녀의 동등권, 즉 남녀평등권은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었다. 여성들의 교육권, 직업권, 참정권, 자기 몸에 대한 결정권 등 여성 인권의 핵심적인 내용을 이루는 이 권리들은 서구 사회에서도 오랜 세월 동안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특히 그 주장은 각 국가들의 고유한 역사적, 사상적, 사회경제적, 정치적 상황들과 맞물리며, 공표된 의미있는 일련의 여성인권 선언들 속에 반영되어 있어 주목할 만하다.
올랭프 드 구즈가 프랑스 혁명이라는 격동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서 공표한 ‘여성과 여성시민의 권리선언’(1791년), 미국 뉴욕 주의 세네카 폴즈에서 개최된 ‘여성권리대회’에서 공표된 ‘공감의 선언’(1848년), 그리고 러시아 혁명의 결과물로서 보편적 남녀평등을 공표한 ‘러시아 인민의 권리선언’(1917)은 ‘여성인권 선언’의 빛나는 계보 속에 자리매김할 수 있는 선언들 가운데 손꼽힌다.
여성 인권선언이 만들어지고 공표되는 과정에서 프랑스의 경우는 계몽주의 사상, 미국의 경우는 노예제 폐지 운동, 그리고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 사상이 여성 주체들 혹은 여성조직들의 운동을 추동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중대한 해결 과제들을 남김으로써 후대가 따라야 할 중요한 전범이자 방향타의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지적해야 한다.
작가이자 혁명가로서 프랑스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나중에 왕당파로 몰려 기요틴의 이슬로 사라진 올랭프 드 구즈는 1789년 프랑스혁명의 가장 눈부신 성과로 손꼽히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 명시된 인간과 시민의 대표성에 의문을 가졌다.
그녀는 이 선언이 철저하게 유산층 시민계급 남성의 이해관계를 대변한다고 보았으며, 여성과 여성시민을 전면에 부각시켰다. 그녀는 1791년 ‘여성과 여성시민의 인권선언’을 공표하고, 여성은 태어날 때부터 남성이 가진 모든 권리를 가지며, 여성이 권리를 더 긴급하게 행사해야 할 특수한 상황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여성의 자연권 행사에 대한 “유일한 장애물은 남성의 영구적인 폭정”이며 이러한 장애는 자연과 이성의 법에 의해 개혁되어야 했다. 구즈의 ‘여성과 여성시민의 인권선언’은 당대에 콩도르세와 메리 울스톤크래프트와 같은 사람들도 함께 공유했던 내용이라는 점에서 그녀만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었으나 당시에 여성의 권리와 관련된 가장 종합적인 요구를 담고 있었고 혁명의 보편주의 원칙에 근거해 여성이 갖고 있는 차이를 주목하도록 요구하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중요한 사실은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여성들은 선동가로서 베르사유 행진을 이끌고 자코뱅클럽을 구성하기도 했으며 의회의 방청석을 지키고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혁명의 과정들을 낱낱이 확인하는 정치적 주체였으나 온전한 시민권을 갖는 법적 주체는 못 되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1791년에 결혼은 시민의 계약이 되었고 1792년에 이혼은 합법적 권리가 되었으나 한마디로 여성의 시민권이란 결혼의 테두리 안에서만 인정되는 것이었다.
프랑스혁명의 사상적 이데올로기가 되어 주었던 계몽사상에 기초해 콩도르세와 같은 혁명가는 인류의 절반인 여성에게 시민권이 부여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당시에 여성은 천성적으로 육아, 가사, 남편을 떠받쳐주는 반려자의 역할에 가장 적합하다는 루소의 주장이 훨씬 영향력이 있었다. 혁명의 주도 세력과 사회가 ‘공화국의 어머니’를 요구하며 여성들에게 가정으로 돌아가기를 요청했을 때 여성들에게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프랑스혁명 이후 반세기 동안 여성들은 좌절을 겪었으며 여성들의 목소리는 역사의 수면 아래로 침잠했다.
1830~40년대에 미국에서는 당대 최대의 논란 대상이었던 노예제 폐지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 여성 운동이 싹트고 있었다. 올랭프 드 구즈의 문제 제기와 프랑스 혁명에서의 한계는 후대의 사람들에게 중차대한 과제로 작용했다. 앞서 우리는 1789년 8월에 공표된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천부인권과 아울러 시민권이 명시되었으나 여성, 노예 그리고 유색의 자유민들은 시민권으로부터 배제되었음을 확인한 바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미국에서 급진적인 노예제 폐지 운동과 여성 운동이 결합했던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19세기 초반까지도 미국 여성의 권리는 제한되어, 여성을 위한 고등교육은 없었고 부유층 여성들만 받을 수 있는 중등교육조차도 자수, 음악, 프랑스어, 예절의 주입에 한정됐다. 기혼여성은 자신의 재산과 소득을 보유할 권한을 법적으로 보장받지 못했다. 남부지역의 경우에는 훨씬 더 상황이 열악했으며 여성들은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제외하고 어떠한 정치적 자유도 없었다.
1840년 국제 노예제 폐지 대회에서 노예제를 폐지할 것인가의 여부와 함께 여성 문제가 부각되면서 미국의 여성 노예 폐지론자들을 중심으로 ‘여성권리대회’ 개최가 논의됐다.
급진적인 노예 폐지론자이자 퀘이커 교도이며 열정적인 연설가였던 루크리셔 모트의 고향인 세네카 폴즈에서 1848년 7월 19일부터 20일까지 이틀간 개최된 이 대회에는 주로 급진적인 퀘이커 교도 여성들이 참석했다. 이 대회는 그후 전국적인 차원에서 여성권리 대회를 개최하는 효시가 되었다.
세네카 폴즈에서 열린 ‘여성권리대회’는 여성들의 문제들을 논의하는 산실이 되었으며, 특히 세네카 폴즈 대회에서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턴이 주도하여 작성한 ‘감정의 선언’, 즉 일명 세네카 폴즈 선언은 미국의 여성 문제를 전면에 제기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선언은 ‘우리는 모든 남자들과 여자들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을 자명한 진리로 생각한다’는 문구로 시작해서 여성이 당해온 학대와 강탈, 여성의 속박과 재산권의 결여, 경제적 종속, 고등교육과 성직에서 여성의 배제를 비판하며 마지막으로 여성 차별의 도덕적 측면을 서술했다. 아울러 선언은 남녀 권리의 평등권, 종교집회의 자유권, 대중 앞에서 여성의 연설권, 선거권, 교육권, 직업권 등에 관한 중요한 권리들을 결의하였으며, 여성의 선거권 원칙의 명시는 나중에 참정권운동을 정당화하는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1848년 당시에는 선언에서 무엇보다도 여성들의 경제권에 초점이 맞춰져 있음을 기억해야 하며 스탠턴과 수잔 엔소니의 지도 하에, 루시 스톤, 루크리셔 모트 등 수많은 활동가들은 여성들의 경제적 독립을 위해 청원 운동을 펼쳤다. 1869년 이후에는 여성조직 내부에서 참정권이 당면 문제로 제기되었는데 해방된 유색인 남성들에게 참정권을 부여하는 문제와 연관되면서 여성들을 결집시키거나 혹은 분열시키는 주요한 관건이 되기 시작했다. 잘 알려져 있듯이 미국은 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에 1920년에 여성에게 선거권이 부여되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러시아에서 여성인권을 위한 활동과 선언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관념으로만 존재했던 사회주의의 이상을 현실화하려는 사람들의 수많은 도전과 실험이 러시아혁명 과정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짧은 지면에서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고 몇 가지만 지적하기로 하자. 1917년 10월 혁명 이후 여성들은 ‘러시아 인민의 권리 선언’에 기초해 남성과 마찬가지로 모든 정치적, 시민적 평등을 부여받았으며, 삶의 모든 측면에서 새로운 기회를 획득했다. 모든 교육기관은 양성에 평등하게 개방되었으며, 그것은 여성들에게 직업적 경력과 고임금 노동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였다. 아울러 공산당 내에서, 몇몇 여성들은 지도부 핵심의 지위에 오르기도 했다.
볼셰비키 정부는 10월 혁명이 성공한 이후, 그때까지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이 주장해왔던 주요 사안들을 검토하고 1918년 10월 17일 소비에트 러시아 공화국의 새로운 가족법을 공포했다.‘1918년의 시민, 결혼, 가족, 친권에 관한 법령은 이미 1917년 12월에 공포한 ‘이혼에 대한 법령’을 확대 보완한 것이었다.
우선 법은 여성과 남성의 신분상의 평등을 보장했고(18조), 결혼을 교회의 수중에서 가져왔으며(82조), 혼인한 부부는 남편 혹은 아내의 성을 선택하는 것이 허용되었다(100조). 아울러 서자와 적자에게 평등한 법적 권리가 부여되었으며(170조, 172조) 제정 러시아 시기에 과도하게 어려웠던 이혼은 쌍방 혹은 한 쪽의 요청에 의해 성립될 수 있었다(87조). ‘배우자’는 결혼 후에도 자신의 국적을 가질 수 있었으며(147조), 일할 수 없는 ‘배우자’는 상대방에게 서로 지원을 요청할 수 있었다(172조). 노동여성은 8시간 노동과 아울러 산전 산후의 출산휴가를 받는다. 임금에 대한 것으로서는 ‘양과 질에 있어 남성과 동일 노동을 하는 여성은’ 동일한 임금을 받아야 했다.‘남녀공학’은 규칙이 되었다. 얼마 후 1920년 11월에 의사에 의해 행해지는 낙태가 합법적으로 허용되었다.
이러한 새로운 가족법을 통해 혁명은 누구보다도 하층계급 여성에게 새로운 문을 열어줄 것이며 여성들을 낮은 신분에 남게 만드는 정치적, 사회적, 젠더적 위계제를 제거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과거에 사회·정치적으로 사회 밑바닥에 있던 노동자들은 이제 상위에 서게 될 것으로 전망되었다. 10월 혁명 이후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에서 젠더와 섹스 관계는 재정의 될 터였다.
이렇게 본다면 적어도 이론적으로 사회주의 혁명은 성적, 정치적, 경제적 수준에서 완전한 양성평등을 의미하였다. 선언 및 법령의 구체적 조항이 실제로 얼마나 실현되었는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앞서 프랑스와 미국의 예에서 보듯이 선언은 많은 경우 당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당위로 작용했고, 후대의 사람들에게는 이뤄야 할 이정표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9월 9일은 지금부터 118년 전에 ‘여권통문’ 공표 기사가 독립신문이라는 언론을 통해 알려진 날이기도 하다. 새로운 삶을 모색했던 북촌 여성들의 함성을 떠올리면서 새로운 기억의 정치를 통해 우리 여성의 역사를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차후에 9월을 ‘여성의 달’로 삼는 것도 그러한 노력의 하나가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