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 우리말터] ‘등멱’이 표준어가 아니라고?

입력 2016-08-18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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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교열팀 차장

열 대야의 냉수를 뒤집어쓰지 않으면 잠을 이루지 못하기에 열대야(熱帶夜)라는 우스개가 있다. 올여름 열대야가 20일 이상 이어지면서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다. 무서운(?) 전기요금 때문에 에어컨 앞에 설 때마다 고민이다. 맘 놓고 켤 수도, 안 켤 수도 없다. ‘산사의 여름은 어떨까?’라는 생각에 광복절 연휴 첫날 경기도 연천군 감악산을 찾았다.

임꺽정이 도당(徒黨)을 결성했다는 감악산. 한국전쟁 때 치열한 격전지였던 이곳은 날씨가 맑은 날 정상에 오르면 개성의 상징 송악산과 서울 북한산을 조망할 수 있어 등산객에게 인기가 높다. 하지만 소뿔도 꼬부라든다는 삼복더위가 아닌가. 인적 드문 한여름의 호젓한 산길을 걸을 수 있었다. 이따금씩 정적을 깨는 새소리와 종아리를 스치는 작은 풀잎의 간지러움이 정겨웠다. 고즈넉한 산길을 좋아하는 이유다.

산 서쪽 자락에 자리한 범륜사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을 봤다. 70대로 보이는 노부부(부부가 아니면 어떠랴!)가 산책 후 한낮의 땀을 식히고 있었다. 웃통을 벗고 엎드린 할아버지의 등에 차가운 지하수를 흘려내리는 할머니의 웃음소리엔 장난기가 넘쳐났다. “어, 차가워! 어, 차가워!” 하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는 행복이 묻어 있었다. 누군가에게 등을 내어주고, 그 내민 등에 물을 뿌린 후 손바닥으로 어루만져 체온을 나누는 일은 사랑하는 이들만이 가능하리라. 샤워와는 차원이 다른 다정함이요, 즐거움이다.

이처럼 팔다리를 뻗고 엎드린 사람의 허리에서부터 목까지 물로 씻어 주는 것을 등목, 등물, 목물이라 한다. 이 중 ‘목물의 잘못’으로 규정했던 등물은 언중의 입길에 자주 오르내린다는 점을 인정받아 2011년 표준어가 됐다. 그런데 등물만큼 씀씀이가 많은 ‘등멱’은 여태껏 표준어에 오르지 못해 아쉽다. 북한에서 쓰는 말이기 때문이란다. ‘등+멱’의 구조로 ‘멱’은 냇물이나 강물 또는 바닷물에 들어가 몸을 담그고 씻거나 노는 일을 뜻하는 순 우리말 ‘미역’의 준말이다. 단어의 의미로 보나 구조로 보나 표준어가 되는 데 문제없어 보인다.

그러고 보니 북한에서 쓴다는 이유로 금기시되는 우리말이 여럿 있다. 쪼각(조각), 누에벌레(누에), 또아리(똬리), 그러매다(얽어매다)…. 하나같이 버리기에 너무나도 아까운 아름다운 우리말들이다. 동무, 인민, 뜨락 등은 표준어에 오르긴 했으나 언중의 입길에서 멀어지며 이젠 듣기조차 어려운 말이 되어 아쉬움을 더한다. 기자가 어렸을 때는 구슬치기, 딱지치기 등을 하며 늘 친하게 어울려 다니는 무리나 벗을 ‘동무’라고 불렀다. 지금은? 그 어떤 연령층에서도‘동무’라는 말을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안타깝고 아쉽다! 그런 까닭에 문학작품에서나마 이들 단어를 만날 때면 몹시 반갑다.

풍요로운 언어 생활을 위해선 지역적 다양성을 인정해야 한다. ‘북한’을 이유로 언어에 ‘족쇄’를 채우고, 표준어가 될 자격마저 박탈할 이유는 없다. 우리에겐 남북을 떠나 고운 우리말을 지키고 사용할 의무가 있다. 머지않아 등목, 등물, 목물과 함께 등멱도 표준어에 오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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