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편 없다던 정부 결국 백기…12년 만에 수술대 올렸지만 장기과제는 TF에
가정용 ‘전기요금 폭탄’에도 부자감세와 전력수급 우려에 누진제 개편은 없다던 정부가 들끓는 여론에 결국 백기를 들었다. 전기료가 많이 나오는 7~9월 3개월간만 누진제 요금구조를 완화해 2200만 가구에 20%가량의 요금 인하 혜택을 주기로 한 것이다. 정부가 한시적 누진제 조정 카드를 꺼내든 것은 지난해에 이어 연속 2년째다.
하지만 과거의 낡은 누진제 전면 손질은 뒤로 미뤄졌다. 정부와 새누리당이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장기적으로 주택용 전기요금 누진제 개편을 논의하기로 한 데 따른 것이다. 일단 성난 민심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시적 인하 방안을 내놓긴 했지만 일시적인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지적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또 그동안 정부가 전기요금체계 개편과 관련해 일관성 없는 정책과 오락가락 행태를 반복하면서 국민들의 혼란만 일으켰다는 비판도 거세게 일고 있다.
11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현행 전기요금 체계에선 누진제에 따라 최저 요금과 최고 요금 차이가 11.7배에 이른다. 한 달간 매일 에어컨을 6시간씩 틀면 18만 원이 넘는 전기요금을 내야 한다.
정부는 지난해 7월 한시적으로 주택용 누진제 제도를 완화했지만 올해는 폭염으로 개편여론이 컸음에도 “에어컨을 4시간만 쓰면 요금폭탄은 없다”고 강조하며 이 같은 요구를 일축했다. 저소득층이 오히려 피해를 입는다는 ‘부자감세’ 논리와 전력대란 우려를 내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오전까지도 “누진제 개편을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했던 우태희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은 오후 브리핑에서 기존 입장을 번복하고 “정부에서도 계속 검토해왔다”고 말을 바꿨다.
이처럼 불과 반나절 만에 이날 2200만 가구에 대한 올 7~9월 전기요금 20% 할인이라는 한시적 누진제 조정안을 내놓으며 정부가 갑자기 태도를 바꾼 것은 폭염 속에 전기요금 폭탄을 맞게 된 국민 불만이 확산하는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여기에 야당은 물론 여당까지 나서 누진제 완화를 압박하면서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일단 전기요금 논란의 급한 불은 끄게 됐지만, 정부의 갈팡질팡 행보에 에어컨도 제대로 켜지 못한 채 고통받아 온 서민들의 분노와 허탈감은 더욱 커지게 됐다. 여론을 무시하고 시간을 질질 끌다 정부 정책에 대한 신뢰만 떨어뜨린 셈이다.
야당에서는 땜질 처방에 그치고 있다는 비판이 당장 나왔다. 더민주 기동민 원내대변인은 이날 서면 브리핑을 통해 “국민의 요구에 귀막고 버티던 정부여당이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부랴부랴 회의를 열고 충분히 ‘예상 가능했던’ 대안을 내놨다”라며 “시대 변화에 뒤떨어진 가정용 전기요금 누진제를 제대로 손질해 근본적인 대안을 내놔야 한다”고 지적했다.
국민의당 손금주 대변인도 이날 정부 대책 발표 후 “정부 여당이 지난해처럼 한시적 조치로 급한 불만 끄겠다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면서 “TF가 꾸려졌지만 정부와 여당, 정부 측 전문가들만으로 구성돼 투명한 논의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우려했다.
여름철 누진제 완화 방안 이외에 근본적인 처방이 될 다른 전기요금 제도 개편 대안이 나오지 못했다는 점은 더 아쉬운 대목이다. 12년 만에 누진제가 수술대에 올랐지만 정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며 조심스럽게 개편작업을 추진하겠다는 입장이다. 우 차관은 이날 정부세종청사 브리핑에서 “2013년에도 국회에서 개편안 논의가 있었지만, 야당 의원들이 ‘누진제 개편은 부자감세’라고 유지하자고 한 적이 있다”면서 “정부가 섣불리 특정안을 내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