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 거목들 18] 고병우 前 한국거래소 이사장

입력 2016-06-28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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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 투기자본 막아라”…증시개방 최전선 야전사령관

오늘날 한국 증시의 혈관은 전 세계 금융시장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주가지수가 글로벌 금융시장 이벤트에 따라 오르내리고, 투자자들이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경제 뉴스에 관심을 두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이 같은 풍경은 생각만큼 오래되지 않았다. 약 25년 전인 1992년 1월 3일 국내 증시가 외국 자본에 개방된 결과다. 한국 자본시장의 역사가 60년 남짓인 점을 생각하면 길지 않은 시간이다.

고병우 전(前) 한국거래소 이사장(제20대, 1990년 3월~1993년 3월 재임)은 국내 증시가 개방의 첫 걸음을 떼던 시기 자본시장의 최전선을 지휘했다. 오늘날 고 전 이사장에게는 ‘개방의 효과를 극대화하되 부작용은 최소화’하는 어려운 임무를 슬기롭게 수행했다는 평가가 뒤따른다. 개방에 따른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컸지만 국내 증시는 큰 홍역을 치르지 않고 세계화의 첫발을 뗐다.

◇ 쌍용증권 사장으로 증시와 인연…해외시장 개척 첫 세대= 고 전 이사장은 농림부 농업개발국장, 청와대 경제비서관, 재무부 재정차관보 등을 지낸 관료 출신 인사다. 문민정부에서 건설부 장관을 지내 세간에서는 공직자로 더 많이 기억되지만, 증권사 사장과 거래소 이사장 등으로 20년 남짓을 보낸 ‘증시통’이기도 하다.

박정희 전 대통령 타계 후 야인으로 돌아갔던 고 전 이사장은 1983년 쌍용투자증권(현 신한금융투자)의 초대 사장으로 취임하면서 증시와 첫 인연을 맺었다. 고 전 이사장은 철저하게 ‘배움’을 중시했다. 처음 맡는 증권회사 경영기법을 배우고자 일본 노무라증권과 야마이치증권을 차례로 방문해 개인교습을 받았다. 이어 미국으로 건너가 메릴린치와 골드만삭스 등 5개 회사에서 신입사원 교육을 받았다. 고 전 이사장이 신입사원과 똑같이 교육을 받는 열정을 보고 미국 증권사 사장이 감탄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고 전 이사장은 국내 자본시장의 저변을 해외로 넓힌 개척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먼저 해외 증권사의 노하우를 배운 뒤에는 해외시장 진출에 힘을 쏟았다. 그는 1985년 미국에 코리아펀드가 상장될 때는 증권협회 정책위원장 자격으로 로드쇼를 진행했고, 1986년에는 쌍용투자증권이 영국 증시에 코리아유로펀드를 상장했다. 정부는 코리아펀드의 잇따른 흥행을 보며 자본시장 개방의 의지를 굳혔고 증시개방을 준비할 거래소 이사장으로 고 전 이사장을 낙점했다.

◇ 제도개선으로 부작용 최소화…성공적 증시개방=고 전 이사장이 거래소에 취임했을 무렵 언론과 학계에서는 증시개방에 대한 반대의견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외국 투기자본이 들어오면 한국 증시가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당시 국내 증시 시가총액은 85조원 수준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당연한 우려였다. 외국 기업 한 곳이 한국 증시 전체를 살 수도 있다거나 외환관리와 통화관리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우려가 팽배했다.

고 전 이사장은 취임 후 친구이자 동료였던 이용만 당시 재무부 장관과 함께 개방의 부작용을 최소한으로 줄이려는 방안을 마련했다. 외국인 전체 투자한도를 상장기업 주식의 10%, 외국인 1인의 투자한도를 상장기업 주식의 3%로 제한했다. 투자금의 유출입은 원칙적으로 자유로게 하되 외국인투자 등록제를 도입해 외국인들이 증권거래소를 통한 장내거래를 하도록 했다.

증시 관련 제도를 글로벌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작업도 서둘렀다. 당시 국내증시의 가장 큰 약점으로 지적됐던 부분은 감리시스템이었다. 고 전 이사장은 감리시스템 정비를 위해 뉴욕증권거래소(NYSE) 이사장과 만나 한국에 NYSE와 똑같은 감리시스템을 이식됐다. 또 공시규정을 다듬는 한편 거래소에 아예 기업공시실을 차리고 상장법인의 공시 담당자들을 교육하기도 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잘 구축돼 있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의 투자시스템과 증시 안전장치 등의 제도는 대부분 이때 틀을 잡았다.

전쟁 같은 준비작업 끝에 1992년 1월 3일 ‘운명의 날’이 왔다. 시장에는 끝까지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우려했던 시장 교란이나 대규모 시장 잠식은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 주가지수가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어 외국계 자본이 개방 초기 급격하게 발을 들이지 못했던 것도 증시개방이 ‘연착륙’할 수 있는 요인이 됐다. 이후 단계적으로 유입된 외국자본은 국내 증시를 크게 성장시킨 원동력이 됐다.

거래소 관계자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의 시각으로는 단지 외국인에게 직접투자를 허용한 것 정도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로써는 자본시장이 커다란 도전을 했던 것”이라며 “고 전 이사장이 지휘관 역할을 훌륭히 해내지 못했다면 우리나라 증시가 전혀 다른 모습이 됐을 수 있다”고 말했다.

증시 개방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고 회장은 1993년 거래소 이사장 임기를 마치고 김영삼 정부의 건설부 장관으로 임명됐다. 이후 1997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 조직위원장, 동아건설 회장 등을 거쳐 현재는 한국경영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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