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화산과 샌더스화산을 폭발시킨 밑바닥에는 오늘 미국이 안고 있는 좌절과 고민이 이글거리고 있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판을 갈아엎자”는 심리가 대통령 예선전에서 폭발했습니다. 미국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축적된 좌절과 분노가 기득권 세력에 화살로 꽂혔습니다.
샌더스화산과 트럼프화산은 전혀 다른 집단과 계층,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공통점은 미국의 주류에 분노하고 식상한 ‘아웃사이더(outsider)’들이라는 것입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트럼프화산이나 “정치혁명(Political Revolution)”의 샌더스화산의 본질에는 기득권을 향한 국외자의 분노와 함성이 있습니다.
트럼프현상
트럼프는 아무리 봐도 정상적인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인간심리의 핵심을 꿰뚫는 동물적 감각이 있습니다. 주위 참모들로부터 이제는 ‘대통령처럼 보이는’ 언어와 행동을 하라는 조언을 받고 그렇게 할 것처럼 보이다가 다시 야생적인 막말을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비난의 역풍을 알면서도 긁어 부스럼을 만들고 있습니다.
체육관에서 만난 백인 남성은 “트럼프 입이 설사를 한다”고 야한 농담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트럼프를 찍을 것같이 말했습니다. 트럼프의 비인격적인 행동을 비판하면서도 트럼프를 찍겠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습니다. 이러한 심리 바닥에는 미국이 쇠퇴하고 있다는 위기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1200만 명에 달하는 불법 체류자를 추방하고, 멕시코 국경에 담을 쌓겠다는, 현실성이 부족한 발언에 열광하고, 무슬림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겠다는 비미국적 주장이 지지를 얻는 저변에는 미국인들의 위기감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미국이 속수무책으로 국경선을 넘는 밀입국자들을 받아들이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멕시코 불법 체류자들이 미국에 살면서 막대한 국민세금을 복지 혜택으로 축내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측면보다 더 큰 위기의식과 거부감은 이들 밀입국자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입니다. 수준 낮은 멕시코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면서 세금만 축내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수준이 낮아지고 이 낮은 수준의 문화가 미국정신, 백인문화를 약화시킨다는 위기심리입니다. 아시아 이민자들에 대해서는 한때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위기감으로 반이민정서를 표출했으나, 아시안들이 똑똑하고 수준이 높아 상대적으로 미국의 질을 높여준다고 인식하면서, 이러한 반이민정서는 사라졌습니다.
멕시코 이민자의 경우는 학력이나 문화 수준에 대한 저항감과 함께 그들이 차지하는 숫자가 엄청나다는 것이 초점입니다. 이들의 숫자가 미국의 문화를 위협할 정도로 많지 않다면 미국은 관용의 얼굴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숫자가 흑인 인구를 넘어서고, 이들의 문화가 미국 문화를 침식하고, 이들이 정치판도에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이라는 미래의 불안이 관용의 가면을 벗겼습니다.
무슬림 입국 금지는 멕시코 이민과 다르면서도 상통하는 면이 있습니다. 무슬림 이민자가 미국의 자생적 테러의 온상지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 이들이 미국에 동화되지 않고 목구멍의 가시가 될 수 있다는 불안감, 무슬림의 강력한 종교성 때문에 미국의 크리스천 문화가 도전받을 수 있다는 불안감이 내재합니다. 다수의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그들과 도덕적 궁합이 맞지 않는 트럼프를 지지하는 것은 무슬림의 침투를 가장 잘 막아줄 사람이 트럼프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트럼프의 이러한 주장이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인종주의, 백인 우월주의, 이민 배척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있지만, 백인 우월주의라기보다는 백인들이 지배해온 미국정신, 건국문화, 기독교문화가 멕시칸문화 무슬림문화로부터 도전받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방어심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인종 다문화를 지향하는 미국에서 이것을 잘못 말하면 백인 우월주의자, 인종주의자가 되기 때문에 모든 지식인과 논객은 진보, 보수에 상관없이 솔직한 발언을 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트럼프를 지지하면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트럼프를 지지할 수 있느냐”는 공격을 받고, 자신의 지적 양식을 의심받을 수 있으므로 속마음을 숨길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내놓고 지지한 사람들이 바로 블루칼라 백인들, 지금까지 한 번도 투표를 하지 않았던 정치경멸 백인들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지만 이들 뒤에는 침묵하는 다수의 백인들이 있습니다. 트럼프현상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미국 우선주의를 부르짖는 트럼프현상의 본질은 백인문화의 색깔과 백인정치의 영역을 빼앗기는 백인들의 불안심리입니다.
샌더스현상
샌더스와 트럼프는 극과 극으로 대조되는 인격을 가졌습니다. 트럼프가 여자들과 쾌락과 돈을 좇으면서 향락과 사치를 즐기는 삶을 살았다면 샌더스는 이념과 이상을 추구하면서도 지금도 작은 쉐비자동차를 타는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샌더스는 트럼프와는 정반대되는 인격과 신뢰의 상징으로 부상하면서 젊은이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습니다.
샌더스는 민주당 후보로 지명되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가 폭발시킨 샌더스화산은 엄청난 정치적 지각변동을 일으켰습니다. 꾸부정한 어깨로 얼마 남지 않은 하얀 머리 숱을 바람에 춤추게 하면서 정치혁명을 부르짖는 74세의 샌더스가 오늘의 정치판을 가져오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샌더스는 민주당 소속이 아닙니다. 스스로 민주사회주의자로 칭하면서 유일하게 무소속 독립 상원의원이었습니다. 대통령에 출마하기 위해 민주당 말을 탔을 뿐입니다. 샌더스는 메시지가 아주 간결하고 간단합니다. 최저임금을 시간당 15달러로 올리고, 공립대학 등록금을 무상으로 하고, 모든 국민에게 건강보험을 제공하고, 미국 업체를 보호하기 위해 자유무역정책을 수정하는 것입니다. 이라크전쟁에 반대했고, 유대인이면서도 팔레스타인의 권리를 옹호하고 이스라엘 정책을 비판하고, 세계의 분쟁에 미국의 무력 개입을 반대합니다. 무엇보다도 미국의 돈을 주무르는 월스트리트를 쉬지 않고 난타했습니다.
예선전에서 힐러리를 가장 괴롭혔던 것 중 하나가 금융계로부터 연설료를 30만 달러를 받았다는 샌더스의 공격이었습니다. 이것은 서민과 중산층을 대변한다는 명분을 내건 힐러리의 가장 아픈 약점이 되었습니다. 시간당 15달러의 임금도 반대하면서 어떻게 자신은 시간당 30만 달러에 달하는 연설료를 받을 수 있느냐 하는 공격은 샌더스 선거전략의 상징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샌더스현상의 핵심이 있습니다. 샌더스는 사회주의자라기보다는 미국의 자본주의 상업주의가 치닫고 있는 모순과 결함을 아주 간결하게 응축한 인간주의 얼굴을 한 시민운동가 모습의 정치인입니다. 샌더스의 지지층은 젊은 층과 독립성 유권자들입니다. 미국의 자본주의는 부익부 빈익빈으로 치닫고 아메리칸 드림은 멀어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해도 집안 배경이 있거나 특출한 능력, 연줄을 만드는 학맥 인맥이 없으면 주류로 진입하기 어려울 만큼 미국 사회는 정실주의(cronyism)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자본주의가 물질제일주의로 변질되면서 모든 것이 돈으로 측정되는 풍토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대학 졸업자의 평균 연봉이 5만 달러 선이고, 기자들의 평균 봉급이 연봉 4만 달러 수준인데 금융가나 스타 방송인들의 연봉은 몇 백만 달러, 몇 천만 달러입니다. 그런데도 최저임금이 아직도 7달러, 8달러가 주종을 이루고 건강보험 없는 사람이 상당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대학등록금이 계속 인상되면서 학생들은 졸업 후에도 빌린 학자금을 갚느라 허덕이고 있습니다. 오바마도 상원의원이 된 다음에 학자금을 갚았다고 합니다. 저소득층에게는 대학 문턱이 더욱 높아지고, 대학을 졸업하지 못하면 임금차가 더 커지고, 대학을 졸업해도 직장이 변변치 못해가는 미국의 흐름이 잘못된 것이고 자본주의가 고장 나고 있다는 좌절의 정곡을 찔렀습니다.
샌더스의 가장 큰 무기는 진정성과 신뢰감입니다. 다소 급해 보이고 분노한 사람처럼 톤이 높은 샌더스 연설이 사람들 가슴을 움직이는 것은 그의 인간적인 양식과 인격 때문입니다. 유대인이라는 인종 배경과 사회주의자라는 이념딱지가 대통령이 되려면 아직도 높은 벽이 되는 대통령 경쟁에서 샌더스는 이 고정관념의 벽을 순식간에 허물어 버렸습니다. 유대인처럼 보이지 않는 정책과 좌파 사회주의자로 보이지 않는 인격은 유대인에게 편견을 가진 사람들, 사회주의에 알레르기 반응을 가진 사람들까지도 지지하게 만들었습니다.
샌더스현상은 미국 자본주의가 잘못 가고 있는 타락한 물질주의와 아메리칸 드림을 멀어지게 하는 기득권 세력과 정치에 대한 젊은이들의 반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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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대 졸. 한국일보 외신부 기자, 한국일보 시카고 편집국장, 시카고 라디오 코리안 주간, 한미TV 부사장 역임.
저서 ‘더디 가도 사람 생각하지요’, ‘궁궁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