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내 기억으로 봄과 여름 사이엔 단오가 있었다. 아니, 여름의 시작이 단오였던 것이다. 도시 사람들은 단오를 잘 모르고, 안다 하더라도 특별한 행사 없이 이날을 보낸다. 그러나 내 고향 강릉은 단오가 다가오기 전부터 온 마을이 들썩인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설날이나 추석만큼이나 큰 명절로 여겨 이날을 기다린다. 추석날엔 따로 용돈을 안 줘도 단오 때는 ‘단오 가용’이라고 해서 아이들에게 단오장에 가서 쓸 용돈을 조금씩 주었다. 그러면 그게 또 한없이 신나는 일이었다.
어린 날 우리가 한마음으로 기다리는 단오는 앵두가 익고 감꽃이 필 때 다가온다. 집집마다 마당가에 감나무가 서 있지만 감꽃은 사실 언제 피는지도 모르게 피어버린다. 이 세상 거의 모든 꽃은 풀에서든 나무에서든 처음 피어날 때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데, 감꽃은 필 때보다 마당에 꽃이 떨어질 때 주목을 끈다.
넓은 감나무 이파리 속에 언제 피었는지도 모르게 노랗게 피었다가 질 때는 공중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잘 달궈진 프라이팬에서 팝콘이 튀듯 마당에서 탁탁 튀어 오르듯 감꽃이 진다. 그러면 동네 아이들 모두 바가지를 들고 감꽃을 주우러 다녔다. 그걸 실에 꿰어 목에 두르기도 하고, 먹기도 하는데 감꽃은 씹으면 생감을 깨물었을 때처럼 떫은맛이 나고, 갑자기 입안에 무언가 한가득 들어온 듯한 느낌이 든다.
감꽃이 피었다 떨어지면 단오가 다가오고 본격적인 여름이 다가온다. 그리고 앵두나무 가지 끝마다 처음엔 희끗하던 열매가 통통하게 과육을 키우고, 이내 구슬처럼 붉은 빛이 돌면 단오가 다가오고 여름이 다가온다.
봄날 종달새 높이 날던 푸른 보리밭이 어느새 황금물결로 출렁일 때, 그 밭둑가에 산딸기가 익고 뽕나무 오디 열매가 검붉게 익으면 우리가 기다리고 기다리던 단오가 다가온다. 단오 속에 여름이 다가온다.
내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당가와 텃밭엔 참으로 많은 나무들이 심어져 있었다. 꽃나무를 심었던 게 아니라 할아버지께서 빈자리마다 과실나무를 심었다. 어디 기억나는 대로 그 나무들을 한번 불러볼까요?
앵두나무, 벚나무, 매화나무, 살구나무, 자두나무, 복숭아나무, 포도나무, 사과나무, 배나무, 밤나무, 대추나무, 호두나무, 산수유나무, 감나무, 모과나무, 고욤나무, 석류나무….
지금 내가 부른 저 나무들은 꽃이 피는 순서보다 열매가 익는 순서를 따라 부른 것이다. 꽃이 피는 순서는 매화가 먼저지만 익는 것은 언제나 그보다 작은 버찌와 앵두가 먼저이다. 산수유도 꽃은 이른 봄에 노란 카스테라처럼 아주 일찍 피어나지만 열매는 한가을이나 되어야 빨갛게 익는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나무의 모습을 살펴보고, 잎과 열매가 익어가는 과정을 살펴보며, 그 나무의 생태를 자기 눈으로 깨닫는 것도 참 재미있는 자연공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단지 덥다는 이유만으로 짜증스러워하는 이 여름에 저 나무들은 가장 힘을 내어 열매를 익힌다. 나무 스스로 나무꼴을 잡아가는 것도 여름이다. 모두 저 나무들처럼 건강하게 여름을 준비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