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 거목들] ⑬한국증시의 첫 시련 ‘1·16 국채파동’

입력 2016-05-10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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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권 매매과열, 지급 불이행으로…58년 1월16일 “거래 무효화” 극약처방

▲1956년 3월3일 서울 명동에 새로 문을 연 대한증권거래소 개소식 모습.
대한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 유찬 이사장 비롯해 전(全 ) 임원 사임. 미화, 제일, 내외, 대창증권 등 4개 증권사 면허 취소.

1958년 1월 16일 증권사들이 국채를 결제하지 못한 ‘1ㆍ16 국채파동’이 낳은 파장이다. 당시는 고(故) 지덕영 전 증권업협회장이 협회를 처음 맡았을 시기이다. 당시 영향으로 태동기를 걷고 있던 한국 자본시장은 공신력을 잃었다. 투자자들이 한동안 자본시장을 외면했던 것도 1ㆍ16 국채파동 사건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국채파동은 정부의 어수룩한 정책과 증권사의 투기가 낳은 결과란 것이 대체적인 평가다. 파동의 발단은 국채발행과 외환특별세법이 충돌했기 때문이다.

1957년 9월 말 재무부는 세수 증대를 위한 외환특별세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외환거래 관련 세금을 더 매기는 것이 골자다. 당시 외환특별세법으로 153억환의 세수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이 때문에 같은 해 10월 초 재무부가 발표한 180억환 규모의 제11회 건국국채 발행 계획은 결국 중단될 것이란 전망이 나왔다. 정부가 세수 확충과 재정 확대 정책을 동시에 내놓으면서 시장의 혼란을 부추긴 것이다.

1950~1960년대에는 주식보다는 채권이 자본시장에서 주로 거래됐다. 상장회사 수가 적은 가운데 그나마 정부 소유이거나 소수 재벌이 대부분 주식을 가지고 있었던 탓이다. 이 때문에 증권사들은 당시 국채의 향후 발행 중단 여부를 두고 베팅을 하기 시작했다.

1957년 9월 20환에 머물던 건국국채 가격은 10월 35환까지 올랐다. 거래량도 폭증했다. 미화증권, 내외증권, 대창증권 등 5개사는 국채 신규발행이 중단되면 기존 국채가격이 폭등할 것이란 데 무게를 두고 1957년 10월에 발행된 국채를 대량 매수했다.

물론 모든 증권사가 국채 발행 중단에 무게를 실은 것은 아니었다. 천일증권, 태평증권, 상호증권 등 5개사는 국채 발행이 중단되지 않을 것으로 봤다. 외환특별세법은 국제 거래에서 공정환율을 유지하는 방침과 어긋나기 때문에 결국 부과되지 못할 것으로 본 것이다.

이에 따라 한쪽에서는 국채를 대량 매수하고, 다른 쪽에서는 대량 매도하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당시 정부의 대응도 안일했다. 국채가격이 치솟자 정부는 국채 발행 재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1958년 1월 초에는 매도 및 매수 세력에 따라 국채가격이 그야말로 롤러코스터를 타는 장세가 이어졌다. 특히 실물이 없는 공매도가 많았던 것은 거래의 위험성을 더욱 높였다.

결국 정부는 같은 해 1월 17일, 지급 불이행이 일어난 전일의 국채 거래를 전면 무효화시키는 극약 처방을 내놨다.

국채파동의 해결사는 한국은행이었다. 한국은행은 1958년 국채를 대량 매수해 결제금액이 부족한 증권사들에 총 4억7000만환을 대출해줬다. 당시 증권사의 자본금이 2000만~5000만환이었던 것을 고려하면 한은의 대출금 규모가 얼마나 큰 것인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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