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기업을 하는가 35] 역발상·역전의 사업, 지금도 자꾸 떠오른다

입력 2016-02-0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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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명주 지지옥션 회장

▲강명주 지지옥션 회장(제공=지지옥션)

대학 졸업 후 1년간 직장생활

내 사업 하겠다, 석유곤로 제조

3년도 못가 접고 법원경매신문

광고없는 선불제…벌써 30여년

나는 살면서 월급쟁이 생활을 1년 해봤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다니던 학교 교직원으로 한 해 동안 근무한 것이 전부다. 직장생활보다는 자기 일을 해보고 싶은 욕망을 이겨내지 못하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 죽음의 길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첫 사업은 석유곤로 제조 및 판매업이었다. 기껏 자기 일이라고 시작했던 사업이, 사업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생활용품 제조·판매업이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인수하기로 한 생산 공장에 갔을 때 철판을 자르는 굉음과 기름 묻은 장갑, 젊은이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보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이런 일이구나’ 싶어 가슴이 두근거리기까지 했다. 하지만 결과는? 3년도 못 가서 파산, 곤로 만들다가 골로 간 것이다.

이후 다른 사업을 시작해야겠는데 사업자금이 없었다. 평생을 갚아도 다 못 갚을 빚을 지고 재기한다는 것은 50kg 돌을 메고 마라톤 완주에 도전하는 격이었다. 재기를 위해, 새로운 사업을 위해 고민하던 어느 날, 대학 다닐 때 학교 신문사에서 배운 활자가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래 신문사를 하자.’ 사무실 한 칸 마련할 돈도 없는 빈털터리가 신문사를 차릴 꿈을 꾼 것이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광고 없는 신문을 만들 구상을 한 것이다.

사실 영세한 신생 신문사에 와서 일할 광고장이도 구할 수 없었겠지만, 1970년대 이후 중앙일보, 문화일보, 세계일보, 국민일보 등 유력 일간지를 비롯해 많은 전문지와 주간지가 앞다투어 창간할 때여서 광고 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는 시기라 그들과 경쟁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광고 없는 신문으로 피해가는 것이었다.

‘광고장이에 의존하는 신문은 망한다.’ 내용만으로 승부하는 정보신문 그것이 바로 법원경매 정보지였다. 신문이라기보다는 찌라시가 맞는 표현이다. 그래도 어찌어찌 일간신문 등록을 하고 제호를 계약경제일보라고 달았다.(나중에 계약경제의 첫머리 영어 GG를 따서 지지옥션이 됐다)

기상천외한 신문을 들고 법원 경매장에 가서 200여명의 입찰자들에게 뿌렸더니 줄을 서다 말고 뺏어가다시피 했다. PR지로 그냥 뿌릴 것이 아니라 팔아보자는 의견이 나와 1000원에 팔다가 2000원으로 가격을 올렸는데도 동이 났다. 천원짜리 지폐가 한 보따리가 됐다. 구독신청도 받았는데 하루에 몇 십 건에 이르렀다. 신나는 것도 잠깐, 몇 달간 보내 주었지만 수금이 안 됐다. 뭐 조선일보도 3∼6개월 무가로 받는 입맛에 구독료를 내겠는가. 한 번 더 승부를 걸었다.

‘선불제’ 사장인 나와 전무인 집사람, 그리고 직원 한 명으로는 도저히 수금을 나갈 여력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선불제로 전환했다. 그런데 선불을 내고 구독을 하겠다는 독자들이 끊이지 않았다. 오히려 밀린 돈도 내고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신문 구독료의 선불제는 34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어떤 신문사도 이루지 못한 사건인 것이다. 회사 창설 이래 미수금이 제로인 회사, 외상 없는 회사가 있을까? 맨손의 발상이 결국 해냈고 그것이 33년의 역사를 지닌 지지옥션의 시작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지 10년쯤 되었을까? 65년에 입학한 동기생이 6개 단과대학, 32개 학과에 1200명 정도 되었는데 전체 학번 동기가 모임을 갖는 ‘65동기회’가 결성되어 한번 모이면 300∼400명씩 모이곤 했다. 소모임으로 등산회, 골프회, 바둑모임 등이 있었고, 특별히 기억나는 모임이 있었는데 공직자 모임이었다. 소위 판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과 행정고시를 봐서 공무원이 된 동기, 교수, 의사, 국회의원 등 방귀깨나 뀌는 20여명이 모이는 곳에 우연한 기회에 관계도 없는 보잘것없는 내가 한번 나갈 기회가 있었다.

빚더미 속에서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초라한 패잔병과 내로라하는 장래가 보장된 공직자들과는 너무나 위상이 달랐다. “한 잔 받아”하며 움츠린 나에게 술잔을 내미는 친했던 친구가 한 손으로 술을 따르는데 나는 한 손으로 술잔을 받기가 거북했으니까. 졸업 10년 만의 격세지감이었다.

2000년대 들어 인터넷 세상을 맞이하고, 또한 경매가 주요 재테크 수단으로 떠오르면서 법원경매 물건자료 제공 및 분석업이 크게 발전하고 정보신문 사업은 날개를 달았다. 내가 다니던 대학신문사에 두 번 기부금도 내어 대학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렸고, 65년 입학동기 50주년에는 제일 많은 기금을 냈다고 감사패도 받았다. 바둑 후원에 뜻이 있어 지지옥션배 여류 대 시니어 연승대항전을 개최하여 매년 2억5000만원씩 후원하는 스폰서가 되길 금년이 10년째다. 얼마 전 퇴직한 공직자를 만났는데 “조그마한 사업체라도 운영하는 것이 제일 소원이었다”라고 나를 부러워하는 눈빛이 씁쓸하기만 했다.

나는 기업을 왜 하는가? 아니 어떤 생각을 갖고 기업을 해 온 것인가?

▲계약경제일보 모습(제공=지지옥션)

시작 때 모두 “안된다” 만류

“생각을 뒤집자” 확신으로 성공

첫 사업의 쓴맛이 오히려 약

실패 두려워하지 않았기에…

나를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게 한 한마디의 좌우명은 ‘역발상, 그리고 역전’이라는 문구다. ‘뒤집다‘라는 뜻의 역(逆)을 기업 경영에 접목해 보면, 기존의 기업 운영 형태를 뒤집기 위해 혁신하고 새성장 동력을 발굴해야만 성공할 수 있다고 확신했으며, 이를 실천해 왔다.

처음 경매정보지를 제작한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만류했다. 서울에서 제주법원까지 한 달에 200번 이상 열리고, 브로커와 깡패들이 횡행하는 법원 열람이 어떤 곳인데…. 그곳에서 경매자료를 베껴 정보지를 만드는 것은 미친 짓이라고 했다. 그 불가능을 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이루어 낸 것이 지지옥션이다.

작은 기업일수록, 새로 시작하는 기업일수록 남들이 해온 방식을 답습하는 미투(me-too)로는 절대 성공할 수 없다. 커피점을 예로 들어 보자. 전국에 커피 전문점이 무려 5만개나 된다고 한다. 내가 있는 회사 근처 숙명여대 앞 300여m 도로변에 있는 커피점이 60개나 되고, 6개월도 못 가는 가게도 부지기수다. ‘미투’ 기업은 먼저 시작한 기업과 덩치가 큰 기업에 절대 불리하다. 몇 번을 실패하더라도 이를 딛고 일어서는 역전의 드라마가 기업의 백미다. 많은 경기 중 야구가 역전이 많은 경기라면 사업은 역전의 기회가 반드시 오는 경기이기 때문에 이 경기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사업의 실패는 인생의 실패로 연결된다. 다시 일어섰을 때에만 인생의 실패를 보상받을 수 있다. 처음 시작한 석유곤로 사업을 접고 4년 만에 지지옥션을 창립하여 지금에 이르게 된 힘은 오직 하나로 귀결된다.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것이다. 첫 사업에 실패했을 때 처음엔 자기 변명을 늘어놓았다. 1979년 석유파동이 나서 석유 제품이 팔리지 않을 때라 내가 망한 건 석유 값이 오른 세상 탓이라고 했고, 나도 그렇게 믿었다.

그런데 석유파동이 나지 않았더라도 나는 파산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유는 제품의 질이 좋지 않았다. 점화도 잘 안 되었고, 석유통이 새는 것도 많아서, 출하되었던 물건의 절반은 반품되어 돌아왔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제품은 질이다’라는 것을 깨닫고 다음 사업을 할 때는 질로 승부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지지옥션을 시작했다. 그 판단은 옳았다. 정보만큼 질을 요구하는 제품은 없다. 질이 좋아야 신뢰가 생기며, 신뢰가 바로 정보의 생명이었던 것이다.

지금은 집합금융투자업, 자산운용사와 조그마한 호텔도 하나 인수해 운영 중이다.

기업을 하는 데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또 하나는 실패가 두려워 정작 해야 할 일을 못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실패를 두려워한다면 절대로 재기할 수 없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는 창업하는 데 실패한 이력을 중요시한다고 들었다. 일본에서 운전기사를 뽑을 때 차주는 사고 낸 경력이 있는 사람을 채용한다고 하니 전과자 취급해서 도외시하는 우리 창업문화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그런데 실패를 적게 하고 성공하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실패를 딛고 사업을 시작할 때 성공 확률을 따지는 것은 상식이다. 일본 소프트뱅크의 손정의 회장은 ‘성공 확률이 70%일 때 승부를 걸어라’라고 강조했다. 이길 확률이 50%일 때 싸움을 거는 자는 어리석고, 이길 확률이 90%일 때 싸우러 가면 늦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고희가 한참 지난 지금도 역발상의 사업, 역전의 사업이 자꾸 떠오른다.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지지옥션 사옥 전경(제공=지지옥션)

△강명주 지지옥션 회장

1943년 경북 울진 죽변 출생

1975년 고려대학교 및 경영대학원 졸업

1983년 ㈜계약경제일보 대표이사 취임

1998년 명지대학교 경제학 교수 임명

2000년∼현재 ㈜지지옥션 회장 역임

2008년 (사)한국기원 이사 임명

2010년 지지자산운용사(주) 대표이사 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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