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기획-자본시장 60년] 사진으로 본 증시 60년

입력 2016-01-01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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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서울 여의도 한국거래소 앞은 점심 때를 제외하곤 한산하다.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증권거래소 앞은 투자자들로 인산인해였다. 직접 종이에 가격을 써내야만 주식을 살 수 있었던 시절이 언제였냐는 듯 이제는 전화도 아닌 컴퓨터와 모바일로 거래가 이뤄진다. 눈에 보이지 않게 거래가 이뤄지는 만큼 시장을 관리감독하는 시스템도 비교할 수 없이 발전하면서 주식 거래와 관련한 범죄 영역도 특정됐다.

▲일제강점기에 자본시장 역할을 해온 조선증권취인소의 모습.
▲1960년대 초 증권시세 게시판.
‘명동 큰손’ 대신 ‘여의도 증권가’가 자본시장의 중심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는 동안 12개로 시작한 유가증권 상장사는 현재 770개로 늘었고 코스닥에서도 1152개 상장사 주식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꿈이, 또 누군가에게는 눈물이 되기도 했던 자본시장 60년 주요 장면을 사진으로 돌아봤다.

▲1956년 3월 금융•보험•증권단이 공동출자해 만든 대한증권거래소가 서울 명동에서 문을 열었다.
◇1950년대, 거래소 시작은 11개 상장사로…주당 70전=우리나라 최초의 증권회사는 1949년 11월 설립된 대한증권이다. 이듬해 1월 정부는 제1회 건국 국채를 발행했으나 반년 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이에 피난처였던 부산을 중심으로 증권회사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1956년 3월에는 대한증권거래소가 문을 열었다.증권거래소 개장 첫날 대한증권거래소 출자증권 시세는 70전(액면 50전)이었다. 증권 시세는 거래소에 붙은 게시판에서 확인할 수 있었고 주식 입찰은 수기로 진행됐다.

▲1961년 한국전력주식회사 창립 당시 주식 입찰 모습.
▲1978년 ‘건설주 파동'으로 주식시장이 휴장했다. 주가가 폭락한 투자자들이 반대시위를 벌이고 있는 모습.
◇1960~70년대, 미숙한 증권시장…속출하는 사고들=초기 미숙한 증권시장에서 연이어 사고가 터지며 증권시장이 장기간 휴장하기도 했다. 1958년 1월에는 국채파동, 1962년에는 대증주 폭락 사태, 1975년에는 건설주 파동으로 주식시장이 크게 흔들렸다. 증권시장이 닫히면 장외로 인파가 쏟아져 나오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1979년 증권거래소 여의도 사옥이 개관하며 금융 중심지로 자리 잡기기 시작했다.
정부는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고 시장을 활성화하고자 자본시장육성법을 마련했다. 이 무렵 한국투자개발공사가 설립되고 부산증권시장도 개장했다. 기업들이 상장을 꺼리자 1974년에는 기업공개 촉진 등의 내용이 담긴 5ㆍ29조치를 실행하기도 했다.

▲1989년 3월 3일에는 주가지수가 최초로 1000포인트를 돌파했다.
◇응답하라 1980년대…본격적인 도약의 시기= 1979년 7월 증권거래소가 여의도로 자리를 옮기며 본격적인 여의도 시대가 개막됐다. 1981년 수출 200달러를 달성하면서 재무부는 자본시장 국제화 장기 계획을 발표하고 자본시장 자유화에 나섰다. 당시 한국투신과 대한투신은 유럽과 미국, 일본, 홍콩 투자자를 대상으로 각각 1500만 달러씩 외국인 전용 수익증권인 KIT(Korea International Trust)와 KT(Korea Trust)를 발매했다.

KIT와 KT가 흥행하자 1994년에는 코리아펀드가 등장했다. 코리아펀드는 1주당 12달러씩 모두 500만주를 공모해 전체 규모가 6000만 달러에 달했으나 공모 첫날 모두 매진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저달러, 저유가, 저금리 등 이른바 ‘3저효과’와 1988년 서울올림픽 등으로 증시 활황이 이어졌다. 1989년 3월 3일에는 주가지수가 최초로 1000포인트를 돌파했다.

◇‘주식 범죄란 이것이다’ 첫 정의 등장= 1976년 증권감독원이 설립됐지만 1980년대가 지나갈 무렵까지 증권 범죄에 대한 개념은 사실상 없는 상태였다. 살인, 강도 등 실체가 뚜렷한 행위가 아닌 주식을 통한 범죄에 대해 투자자들은 무지했고 이는 당국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에서 주식 관련 불공정행위로 감독당국의 조사제재를 받은 첫 사례는 1988년 5월 13일 나온 광덕물산 사건이다. 감독당국 관계자들은 어떤 매매 행태는 그 자체로 범죄가 될 수 있다는 개념을 빈 도화지 위에 그려나갔다.

◇1990년대 시한폭탄이 터지다…IMF와 극복의 역사= 1997년 벽두 한보사태로 시작된 대기업 연쇄 부도는 외환위기를 불러왔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게 되면서 주가도 무섭게 하락하기 시작했다. 1997년 7월 종합주가지수는 726포인트, 시가총액 134조660억원에서 1년 뒤인 1998년 8월에는 310포인트, 시총 64조6400억원으로 반토막이 났다. 부도로 업무가 정지된 증권사 창구에는 망연자실한 시민들의 항의가 줄을 이었다.

외환위기 중이었던 1998년 4월 새로운 금융감독기구로 금융감독위원회(이하 금감위)가 출범했다. 금감위의 집행 기구로 이듬해 금융감독원이 설립됐다. 비슷한 시기 시장침체를 극복하고자 코스닥시장 육성 방안이 마련되면서 코스닥 위원회도 설립됐다.

▲2011년 5월2일 코스피지수가 장중 2228.96 포인트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옵션ETF 개설 시장 다양화…IT버블리먼사태 충격도 =2000년대 들어 주식옵션시장이 마련되고 상장지수펀드(ETF)시장, 주식워런트증권(ELW)시장이 개설됐다. 코스피도 2000포인트를 돌파하며 호황을 보이는 등 본격적으로 자본시장이 글로벌 수준에 맞춰 다양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천정부지로 치솟은 IT 기업들의 거품이 빠지며 시장에 충격을 줬고 2008년에는 리먼 브라더스의 파산으로 시작된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국 주식시장에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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