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와 대중문화, 지난 70년간의 문양은? [배국남의 대중문화 읽기]

입력 2015-10-03 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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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한류를 거세게 일으킨 드라마 '겨울연가' (사진=KBS)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 중대 방송이 흘러나왔다. 일본 히로히토(裕仁) 천황의 항복 선언이었다. 조선에 대한 일제 강점의 종언이었다. 라디오를 통해 전달된 광복은 대중문화의 판도를 바꿔 놓는 분수령이었다.

대중문화는 다수가 향유하는 문화다. 대중문화는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가능하게 하는 매스미디어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학자에 따라 이견은 있지만, 대중문화는 라디오, 방송, 인터넷 등 매스미디어에 의해 제작, 유통되는 문화여서 매스미디어의 문화라고도 한다. 미디어학자 헤롤드 이니스(H.Innis)는 사회의 상태와 문화적 특성이 그 시대의 지배적 미디어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광복 이후 70년 동안 매스미디어의 지형도에 따라 대중문화의 문양도 변화해왔다.

일제 강점기에 싹트기 시작한 대중문화는 광복으로 인해 매스미디어의 둑이 터지며 양적, 질적 성장을 했다. 지난 70년 동안 신문, 잡지, 영화, 라디오, TV, 인터넷 등 매스미디어가 양적, 질적 진화를 거듭함에 따라 수많은 대중이 즐기고 향유하는 대중문화 역시 많은 변화를 한 것이다.

1927년 2월 일본어와 조선어로 방송되던 경성방송국으로 서막을 연 라디오 방송은 광복 이후 수신기와 청취자 확대로 인해 대중문화의 산실 역할을 톡톡히 했다. 광복과 함께 경성방송국은 서울중앙방송국으로 이름을 바꿔 방송을 시작하는 등 남한은 10개, 북한은 7개 라디오 방송이 보도, 정당방송 등을 내보내는 한편 ‘스무고개’‘노래자랑’ 미국 프로그램 포맷을 모방한 프로그램들을 신설해 내보냈다. 1956년 방송된 작가 조남사의‘청실홍실’로 붐이 일기 시작한 라디오 연속극은 1950~1960년대 대중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대중문화 장르로 자리 잡았다.

광복에서부터 1950년대까지 라디오는 음악, 예능 프로그램과 연속극을 통해 한국 대중문화의 스펙트럼을 확장했다. 특히 1954년 기독교방송(CBS) 개국을 시작으로 라디오 민영방송 시대가 본격화하고 라디오 수신기 보급이 확대되면서 라디오는 대표적인 오락 매체로 부상했다. 1957년 서울 시민을 대상으로 한 조사 결과, 라디오의 청취시간이 3~5시간인 청취자가 29%, 5시간 이상 듣는 사람도 21%에 달했을 정도다.

광복 직후 서민들이 가장 즐겨 찾았던 신파극과 악극은 라디오 연속극과 음악, 예능 프로그램으로 일부 흡수됐다. 치열한 청취율 전쟁터로 변한 라디오 연속극은 다양한 장르와 소재를 발굴하며 청취자들의 열렬한 인기를 누렸다. 대중의 사랑을 받은‘청실홍실’‘산 넘어 바다 건너’‘동심초’등 수많은 라디오 연속극들이 영화의 원작으로 활용되며 영화의 지평을 확장하는 역할도 했다.

▲라디오를 통해 데뷔한 이미자.(사진=뉴시스)

이미자가 1959년 ‘열아홉 순정’으로 KBS라디오를 통해 데뷔하는 것을 비롯해 라디오는 음악 프로그램 등을 통해 신인가수를 배출하는 연예인 등용문 역할을 했다. 또한, 트로트 위주에서 댄스 음악 등 다양한 음악을 소개해 대중음악 장르 확장에도 기여했다. 일제강점기 라디오는 일본 대중문화의 유통기지 역할을 했고 광복 이후에는 미국 대중문화를 소개하고 유포시키는 주도적 미디어였다.

1960년대 미디어 상황은 급변했다. 1961년 12월 31일 KBS TV 개국을 시작으로 1964년 DTV(TBC 전신), 1969년 MBC TV 개국 등으로 TV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고 동아방송 등 민영 라디오 방송국의 증가, 영화의 인기폭발 등 미디어 환경의 변화로 인해 대중문화 지형도도 크게 달라졌다.

▲60~80년대 음악 트렌드를 이끈 라디오DJ 고 이종환(사진=뉴시스)

이 시기 라디오에 주도된 대중문화는 영화와 TV로 무게중심이 점차 옮겨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라디오 연속극은 대중의 사랑을 많이 받는 대중문화 상품이었고 1964년 동아방송 최동욱에 의해 진행된‘탑툰쇼’에 처음 도입된 DJ(Disk Jockey) 시스템의 프로그램이 청취자 특히 중고생, 대학생 등 젊은 청취자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최동욱, 피세영, 이종환, 박원웅 등 DJ들에 의해 진행되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젊은이들의 트렌드를 창출하는 진원지였을 뿐만 아니라 팝 음악 등 외국 대중음악과 문화에 대한 정보 전달자 역할을 했다. 또한, 조영남, 이장희, 송창식 등 스타 가수를 배출하는 스타 메이커 역할을 한 것도 바로 DJ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유명 DJ와 스타 가수들이 진행하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은 1970~1980년대까지 수많은 라디오 키즈를 양산했다.

KBS TV를 시작으로 TBC, MBC가 차례로 개국하면서 공민영 TV 시대가 열린 1960년대에는 TV가 사극과 시대극, 현대물 등 다양한 장르의 연속극과 쇼, 코미디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대중의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하지만 TV 수상기의 보급 부족과 콘텐츠 제작능력의 한계, 매년 100~200편 제작되는 영화의 폭발적 인기로 인해 TV는 대중문화의 대표 미디어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하지만 TV시대의 개막은 드라마, 음악, 예능, 영화 등 대중문화 스펙트럼을 폭발적으로 확장하는 원동력 역할을 했다.

1973년 TV 수상기 보급대수가 100만대를 넘어서면서 TV는 미디어의 대표주자이자 대중문화의 메카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1966년 실시된‘TV 가진 이후 나타난 변화’에 대한 한 조사에서 18.8%가 라디오를 덜 듣게 되고 11.1%가 영화를 덜 보게 됐다고 답했다. 이 비율은 TV 보급이 확대되면 확대될수록 증가했다.

1970년대 매스미디어와 대중문화 총아로 떠오른 TV는 ‘아씨’‘여로’‘꽃피는 팔도강산’‘신부일기’등 일일극과 주말극을 중심으로 대중문화 흐름을 주도해나갔다. 특히 1970년대 일일극의 폭발적 인기는 TV 수상기 판매증가를 초래할 정도였고 대중의 패션, 연애, 결혼,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화제의 중심도 바로 일일극 등 TV 연속극이었다. 시청률 70%를 기록했던‘여로’의 여자 주연 태현실은 “‘여로’를 방송하는 시간에는 거리가 한산했다. ‘여로’에서 악역을 맡은 연기자들은 주인이나 손님들에게 봉변을 당해 식당에도 못 갔다. 수많은 시청자가 ‘여로’에 너무 몰입해 극 중 배역과 실제 연기자를 분간하지 못할 정도였다. ‘여로’는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은 드라마였다”며 당시 인기를 전했다.

연속극뿐만 아니다. 악극무대에서 활동했던 코미디언들은 ‘웃으면 복이 와요’등 TV 코미디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코미디를 만개시켰고 ‘쇼쇼쇼’같은 쇼 프로그램은 트로트뿐만 아니라 발라드, 포크, 록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발전시켰다. 또한 예능 프로그램의 하위장르의 다양한 분화를 가져왔다. 대중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했던 TV 드라마, 쇼, 코미디는 “대중문화는 저질이다”라는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는 일부 지식인과 공무원들로 인해 징계와 규제의 억압을 받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언론통폐합으로 시작된 1980년대에는 컬러 TV 시대가 열렸다. 1980년 12월 1일 이광표 문공부 장관이 KBS청사에서 컬러 방송 스위치를 누름과 동시에 시작된 컬러 TV시대는 일일극, 미니시리즈, 주말극 등 다양한 장르의 드라마를 더 인기 있게 만들었고 화려한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컬러 방송으로 인해 대중의 패션부터 화장까지 문화와 생활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TV 중심의 미디어 환경이 확고히 구축된 1980년대, 라디오는 청소년과 젊은 층을 대상으로 하는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별이 빛나는 밤에’ ‘밤을 잊은 그대에게’등 심야 DJ 음악프로그램이 라디오의 존재의미를 드러내며 대중음악과 청소년들이 향유하는 대중문화에 영향을 끼쳤다.

1991년 SBS 개국으로 KBS, MBC 지상파 TV 방송 3사가 시청자 잡기에 치열한 경쟁에 돌입하고 1995년 음악채널, 영화채널 등 30개 채널로 출발한 케이블TV와 부산방송 등 지역민방이 개국하면서 1990년대는 TV가 음악, 드라마, 예능, 심지어 영화까지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새로운 대중문화 창출 기지 역할을 했다. 대중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은 1980년대까지는 일본과 미국 영향을 많이 받아 모방한 프로그램도 많았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는 드라마 기법부터 예능 포맷까지 한국적인 특색이 잘 드러나면서도 독창성과 완성도 높은 프로그램들이 급증했다. 다채널이라는 TV의 양적 변화가 프로그램의 질적 변화를 초래한 시기가 바로 1990년대다.

▲한국 대중음악을 한차원 높인 가수 조용필(사진=뉴시스)

1990년대는 젊은이들의 환호를 받았던 트렌디 드라마에서부터 대하사극에 이르기까지 드라마의 하위 장르가 진화했고 예능 프로그램 역시 시트콤, 토크쇼, 버라이어티, 음악프로그램 등 다양한 장르의 프로그램들이 개발돼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물론 TV는 대중문화의 가장 중요한 연예인을 양산하는 스타 시스템의 핵심이었다. 196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TV 방송사가 탤런트 공채 시스템을 구축해 수많은 연기자 자원을 양성했다. 음악 프로그램과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맨 콘테스트를 통해 가수와 예능인들도 배출했다. 현재 한국 대중문화를 주도하고 있는 김혜자부터 장동건 배용준 이병헌 유재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연기자와 예능인들이 바로 TV가 배출한 인적 자원들이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들어 TV는 한국 역사상 가장 큰 문화적 사건으로 평가받는 ‘한류’를 일으키고 발전시킨 주체였다. “5000여 년의 한국역사에서 ‘한류’만큼 가장 큰 문화적 사건은 없다”는 전문가 평가의 주역은 TV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1997년 중국에서 방송된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사랑이 뭐길래’등이 신드롬을 일으키며 중화권에 드라마 중심의 한류가 일기 시작했다. 한국 드라마, 음악, 예능 프로그램은 전 세계인이 좋아하는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대중문화산업의 핵심 역할을 했다.

‘대장금’으로 중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 한류를 일으킨 이병훈 PD와 ‘겨울연가’로 대중문화 선진국이라는 일본에서 한류를 본격화시킨 윤석호 PD는 “한류는 방송을 비롯한 우리 대중문화가 미국, 일본의 아류라는 인식에서 벗어나 중국, 일본 더 나아가 대중문화 본산이라는 미국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을 느끼게 한 대중문화적 사건이다”고 의미부여를 했다. TV 드라마로 촉발된 한류는 이제 K-POP, 예능, 영화 등 대중문화를 넘어 한식, 한복, 화장품을 비롯한 한국제품 등 한국 문화, 경제 전반에 걸쳐 세계인들의 관심을 촉발하며 확대재생산 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TV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변하며 또 한 번 도약했다. 디지털 방식은 다채널을 가능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화질과 음질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키고 데이터 방송 다양한 TV 방송을 가능하게 해 대중문화 진화에 큰 기여를 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인터넷이 보편화하고 2009년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인해 대중문화의 패러다임이 바뀌기 시작했다. CD등 음반 중심의 대중음악은 디지털 음원 시장으로 재편되고 TV 프로그램 역시 TV 수상기가 아닌 웹,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플랫폼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TV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이 형식과 포맷의 변화가 초래됐고 수용자의 시청패턴까지 변모하고 있다.

1995년 ‘모래시계’주연을 했던 고현정은 “1990년대에는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기 위해 일찍 귀가했는데 이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어요. ‘모래시계’가 ‘귀가시계’라는 말은 전설이 돼 버렸지요. 집에 가지 않고도 자동차나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해 좋아하는 드라마나 대중문화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니까요”라고 말했다.

스마트폰, 태블릿 PC 등 대중문화 콘텐츠를 유통하는 새로운 플랫폼이자 미디어의 등장은 웹툰, 웹드라마 등 새로운 대중문화 상품을 낳았고 ‘마이 리틀 텔레비전’같은 인터넷 방송과 TV결합 등 이전에 전혀 볼 수 없었던 대중문화를 양산했다. 무엇보다 짧은 시간에 편리하게 즐길 수 있는 스낵 컬처(Snack Culture)를 대중문화의 주요한 흐름으로 부상시켰고 전 세계인이 실시간으로 우리 드라마와 예능, 음악을 소비할 수 있는 대중문화 환경을 조성했다.

한편, 라디오와 TV 등 매스미디어는 광복 이후 지난 70년간 대중에게 즐거움을 많이 선사한 스포츠의 진화와 변화도 초래했다. ‘현대 스포츠는 미디어의 스포츠’라고 할 만큼 스포츠에 있어 TV 등 방송 미디어는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라디오가 미디어의 중심이던 1950~1960년대에는 김기수 선수의 세계타이틀전 복싱 중계방송 등 라디오 중계방송은 궁핍한 시대에 힘든 생활을 하던 서민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한편 스포츠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스포츠 발전과 관심을 유도했다.

또한, 1964년 도쿄올림픽대회와 1966년 방콕 아시아 경기대회 등 국제스포츠 이벤트를 해외에 나가 직접 중계해 국위를 선양하는 우리 선수들의 승전보를 시시각각 전달하고 선진적인 스포츠 대회를 통해 완성도 높은 스포츠 방송의 노하우를 쌓았다.

▲TV는 스포츠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했다. (사진=뉴시스)

TV 중심의 미디어 시대가 열리면서 TV 스포츠 방송은 스포츠팬을 급증시키는 한편 스포츠 발전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1970년 멕시코 월드컵을 녹화 방송해 장안의 화제가 됐을 뿐만 아니라 TV를 통해 전달된 축구 강국들의 경기 모습은 우리 선수들의 실력 향상에 촉매제 역할을 했다. TV 중계는 스포츠 종목에 대한 대중의 관심으로 이어져 고교 야구 등 많은 종목이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1978년 방콕 아시안 게임을 KBS 등 방송 3사가 합동방송을 하면서 스포츠 중계 기술도 크게 발전했고 1980년대 들어 프로야구를 시작으로 열린 프로 스포츠는 TV의 스포츠 중계와 스포츠 뉴스 방송으로 만개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아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는 한국 스포츠와 스포츠 방송사에 한 획을 그었을 뿐만 아니라 스포츠의 저변확대, 스포츠 프로그램의 진화, 스포츠 중계기술의 발전, 그리고 스포츠를 통한 국민의 자긍심 제고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1980~1990년대 TV는 참여하지 않고 보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관중스포츠의 묘미를 극대화했다. 이후 TV에 의해 시시각각 입체적으로 중계 방송된 2002년 한일월드컵 경기는 축구로 전 국민을 하나로 만드는 거대한 스포츠 이벤트를 연출해 냈다.

2000년대 들어 KBS, MBC, SBS 등 방송 3사와 스포츠 채널 케이블 TV의 지나친 방송 경쟁으로 전파 낭비와 중권계료 인상 등 부작용도 있었지만, TV는 축구, 야구, 농구 등 인기 종목뿐만 아니라 피겨, 수영 등 비인기 종목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으로 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켜 스포츠의 균형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광복 이후 척박한 환경에서 출발한 한국이 스포츠 강국으로 우뚝 선 데에는 라디오와 TV의 스포츠 방송으로 인한 스포츠 관심 확산과 스포츠 선수의 양산이 자리하고 있다.

(이글은 관훈저널 2015년 가을호 기고한 글임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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