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이 역사를 낳는다-세계 여성박물관 현지 취재] <10ㆍ끝> ‘우리 여성박물관 이렇게 짓자’ 좌담회

입력 2015-09-15 13:07수정 2015-09-15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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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사박물관을 현대사가 생동하는 공간으로 만들어야”

“영원한 것, 여성적인 것, 한국적인 것 충족…규모 크지 않더라도 서울 중심지에 위치”

“생태주의 등 메가트렌드 이끌 공간 돼야…사업 제자리걸음 상태, 정부 후속지원 절실”

▲한국의 여성사박물관 건립을 위한 좌담회가 9일 이투데이 접견실에서 열렸다.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여성사박물관의 조속 건립을 위한 여성계와 정부의 노력을 촉구했다. 최유진 기자 strongman55@

이투데이는 ‘여성이 역사를 낳는다’라는 제목 아래 7월 14일부터 9월 8일까지 매주 1회 해외 여성박물관 탐방시리즈를 게재해왔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후원을 받아 6개국 8개 박물관을 찾은 시리즈를 마치면서, 기획취재의 의미와 한국 여성사박물관 건립을 위해 앞으로 해야 할 일 등을 점검하는 좌담회를 마련했다. 좌담회에는 한국 여성사박물관 건립추진협의회 임원들과 이투데이 취재진이 참석했다.

<참석자> : ▲정현주 여성사박물관 건립추진협의회 추진위원/(사)역사·여성·미래 상임대표 ▲기계형 여성사박물관 건립추진협의회 추진위원/한양대 연구교수 ▲임철순 이투데이 주필 겸 미래설계연구원장 ▲김윤경 이투데이 기획취재팀 부장 ▲김민정 이투데이 기획취재팀 기자

임철순=해외 취재를 통해 많은 것을 보고 얻을 수 있었다. 이번 기획취재 기사에 대한 평가부터 한다면?

▲정현주 여성사박물관 건립추진협의회 추진위원/(사)역사·여성·미래 상임대표
정현주=최초로 주요 신문에서 세계의 여성사박물관에 대해 집중 취재한 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감사하다. 맨 처음에 나온 총론(임철순 집필)은 인문학 소양이 깊은 것 같아 인상 깊게 읽었다. 학자들이 보통 쓰는 것과 다른 언어로 된 기사여서 신선했다.

다만, 시리즈의 전체 제목 ‘여성이 역사를 낳는다’는 ‘여성이 역사를 만든다’가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낳는다’는 여성의 자연적, 생물학적 측면을 강조하는 말이지만, 때로 반여성적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여성의 위치와 활동을 가정이나 양육에 한정하는 의미로 읽힐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여성이 역사를 만든다는 점이 강조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계형=그동안 빠짐없이 읽었다. 박물관마다 특징이 있는데 세계의 주요 여성박물관들의 핵심적인 성격을 잘 짚어주었다. 이번 기획의 초점은 ‘한국은 어떻게 여성사박물관을 지을 것인가’로 귀결되어야 하며, 오늘 좌담회에서는 우리의 여성사박물관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어떤 내용을 갖출 것인가, 어떻게 구체화할 것인지를 이야기해야 할 것 같다.

임철순=각국 박물관을 분석하고 평가해 보자.

기계형=이번 취재에도 언급돼 있지만 미국의 경우 여성사박물관 건립이 아직 표류 중이다. 여권이 강한 나라이지만 주를 넘어서는 전국적 차원의 여성사박물관 건립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된다. 여성집단 전체의 자율적이고 지속적인 참여와, 연방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얻기 위한 건립 노력이 우리의 상황과 닮아 있어 반면교사로 생각된다. 중국과 베트남 기사도 흥미롭게 봤다. 그런데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 건립을 지원한 중국의 경우 규모는 크지만 얼마나 많은 관객이 오는가 하는 사회와의 접점을 생각해볼 때, 박물관으로서의 기능에 다소 문제가 있다고 여겼다. 개인적 경험으로는 중국사회에서 부녀아동박물관의 존재감이 예상보다는 작다는 느낌을 받았다.

김윤경=중국 부녀아동박물관을 3시간 가까이 살펴봤다. 취재를 하면서 여러 가지를 느꼈다. 다음 날(6월 1일)이 아동절이어서 그런지 관람객도 많았고, 아이들의 활동공간으로 잘 활용되는 것 같았다. 박물관 구성의 전체 논리도 잘 짜였다. 국가가 주도적으로 만든 곳이어서 그런 게 아닐까.

김민정=베트남의 경우 여성연합이라는 단체가 여성의 역사를 기록하는 작업을 시작한 게 박물관 건립의 계기였다. 처음 책이 나온 지 13년 만에 정부의 지원을 얻어내 박물관을 지은 과정이 인상적이었다.

정현주=중국과 베트남은 사회주의 체제와 그 이념을 정당화하는 형식으로 만든 게 특징이라고 할 수 있겠다. 부녀단체가 하나로 통일된 점도 큰 이점이었을 것이다. 우리도 이런 경우처럼 시민들이 앞장서고 국가의 지원을 얻는 형태를 취해야 한다. 하지만 서구의 박물관들이 시민 자체의 노력과 힘으로 박물관을 건립하고 운영해 가는 정신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한다.

임철순=우리 건립운동은 어떤 단계인가.

정현주=여성사전시관이 서울 대방동 여성플라자 한편에 자리 잡은 게 2002년인데 볼품이 없었다. 2012년에 여성사학회가 대대적인 캠페인을 벌여 그해 9월 여성사박물관 건립추진협의회가 발족됐다. 2014년에 여성발전기본법에 여성박물관 설립에 대한 규정이 들어가게 했다. 여성가족부의 용역을 받아 작년엔 부지 선정과 건립에 관한 기본계획안도 수립했다. 부지로는 세종시, 고양시 등도 논의됐는데, 접근성이 좋은 서울 4대문 안으로 찾아보자 해서 몇 군데 후보지가 선정된 것으로 알고 있다. 모두 서울시와 협의를 거쳐야 하고, 4대문 안이라 규모도 작은 것으로 알고 있다.

▲기계형 여성사박물관 건립추진협의회 추진위원/한양대 연구교수
기계형=한국의 상황은 작년 12월 여성사박물관 건립 기본계획 및 콘텐츠개발연구 프로젝트 완료 이후, 여성계의 다각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지 최종 선정 등과 같은 정부의 후속 지원프로그램이 없어 중단된 실정이다.

임철순=박물관을 어디에, 어떻게 짓느냐가 중요한데.

정현주=지방으로 가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 수도 한복판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오는 것이다. 작더라도 접근이 쉬운 곳에 빨리 짓고, 각 지역에 있는 여성플라자와 연계하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여성사박물관은 서울의 중심지에 있어야 한다. 문화의 중심지, 역사의 중심지인 서울을 벗어나는 것은 소외대상이었던 여성을 다시 소외시키는 일이다.

기계형=박물관은 어떻게 보면 과거의 유물이 있는 무덤 같지만 살아 움직이는 곳이다. 관 주도의 협력을 받는다면 당장 지을 수는 있어도 사람들과 함께하는 젠더적 박물관이 되기는 힘들다. 한국 여성들의 삶과 역사를 총체적으로 담아내는 현재진행형 공간이 돼야 한다. 이참에 여성사박물관의 개념을 전면적으로 다시 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중국 베이징에서 북동쪽으로 20km 거리에 ‘798 예술거리’가 있다. 폐허가 된 산업시설을 살려 대규모 전시가 진행되고 있다. 이것은 요즘 하나의 트렌드다. 여성이 역사를 낳는다는 말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해 여성사박물관 개념을 획기적으로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다. 서울시내의 낡은 산업시설이나 기존 건물에 생태주의를 도입하여 공간을 재구성, 여성사박물관을 만드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한국에 여성사박물관을 짓는다면 메가트렌드를 이끌어갈 수 있는 박물관이 돼야 할 것이다.

정현주=시리즈의 총론에서 언급된 대로 영원한 것, 여성적인 것, 한국적인 것 세 가지가 들어가야 한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전체적 흐름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느끼게 하려면 현대사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해야 한다. 현대사 유물은 수집도 수월하다. 현대에 역점을 둔 유물 수집과 콘텐츠 연구를 많이 해야 한다.

기계형=나는 국내 28개 국공립 박물관을 대상으로 여성사박물관 조성에 필요한 유물을 조사한 바 있다. 그 과정에서 재확인한 것은 남성 지배의 역사 속에서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게 많다는 점이었다. 밥그릇도 우리 여성들이 보기에는 중요한 유물이다. 여성 유물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우리 여성사박물관은 현대사를 강조해야 한다. 외국 학자들은 한국 여성의 교육적 수준, 공적 참여활동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현대사 속에서 여성이 무엇을 이뤄냈는지, 근대화에서 여성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드러내 주어야 한다.

임철순=이제부터 해야 할 일에 순서를 매긴다면?

기계형=박물관은 통상 기본계획이 수립되면 바로 부지 선정에 들어간다. 부지 선정 후 최종 건축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더구나 각 단계는 깊은 연구를 바탕으로 진행돼야 한다. 현재는 기본계획 프로젝트 이후 예산 문제 등을 이유로 제자리걸음 상태다. 여성계는 물론 정부가 좀 더 움직여줘야 한다. 아울러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정현주=일단 후원자 찾기와 기금 모금이 우선이다. 그리고 동시에 캠페인을 벌여야 하며 기초적 연구가 병행돼야 한다. 지금 우리 활동은 ‘숨 고르기’ 상태인데 왜 박물관을 세우는가, 왜 필요한가 등 비전을 제시하는 큰 그림을 그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기금 후원자를 모으고, 연구하고, 정부에 부지 선정을 촉구해야 한다. 모금이나 홍보활동을 하면서 남성의 참여도 더 활성화시켜야 한다. 현재 협의회에는 남성이 5% 정도 있다. 여성과 남성이 함께 한 여성사박물관 건립이 21세기 문화의 시대를 이끌어가는 화두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투데이를 필두로 많은 언론이 큰 관심을 가져주기 바란다.

진행: 임철순 주필 fusedtree@ 기록: 김민정 기자 mj_kim@

후원: 한국언론진흥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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